[한라일보] 우리는 구도심의 빌딩 사이로 드문드문 속살을 드러낸 제주성(濟州城)의 흔적을 마주한다. 제주 성곽은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거친 파도와 외세의 침탈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내려 했던 제주인의 삶의 경계이자 저항의 궤적이다.
제주읍성을 비롯한 성곽의 역사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10년(1105년) 축성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 시대를 거치며 확장과 보수가 반복됐다.
제주가 '성(城)의 나라'로 불릴 만큼 견고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남해의 요충지였던 제주는 끊임없는 왜구의 침입에 노출됐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과 별개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어렵게 일군 터전을 지키기 위해 제주 사람들은 기꺼이 무거운 돌을 날라 성벽을 쌓아 올렸다.
1000년을 버텨온 제주 성곽이 본격적으로 허물어진 것은 일제강점기다. 1920년대 중반, 일제는 산지항(현재의 제주항) 포구 개발과 항만공사를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제주읍성을 조직적으로 훼철(毁撤)하기 시작했다. 성벽은 뜯겨나가 바다를 메우는 골재가 됐다. 이는 제주의 상징적 방어막을 해체해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강탈의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은 잔존 성곽들은 이제 세월의 무게와 관리 부재로 신음하고 있다. 최근 제주성지 남동쪽 끝자락인 제이각(制夷閣) 인근 축대가 힘없이 붕괴돼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을 봤다. 기록적인 폭우와 기후 변화 등의 원인이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관심이 멀어진 탓이기도 하다.
요즘 남문로터리 주변 한짓골 입구에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며 상권에 활기가 돌고 있다. 이곳은 과거 제주성의 관문인 정원루(定遠樓)가 서 있던 자리다. 현재 구도심 개발과 복원 사이에서 관의 행정이 고심을 거듭하며 주춤거리고 있으나, 이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원형 보존을 주장하는 학술적 견해와 복원을 바라는 목소리가 상존하는 만큼, 물리적 재현에만 매몰되기보다 이곳을 역사적 장소로서 손색없게 가꿔나가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도시의 역사성은 역사적 공간이 제대로 조성됐을 때 공고히 지켜지고, 이를 통해 관광 활성화와 더불어 도시문화의 생명력도 왕성히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곽은 과거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성벽을 지탱하던 주변 지반이 무너진 것을 바라보며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돌의 붕괴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역사의식의 붕괴다. 제주 성곽은 척박함 속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제주 정신의 골격이다. 지키고자 했던 삶의 경계가 선명할 때, 제주는 비로소 제주일 수 있다. 그래야 제주인의 정신을 담은 성곽은 영원한 제주의 심장으로 남을 것이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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