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한창 그림을 좋아하던 청소년 시절을 돌아보면, 형상의 표현 없이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색으로 칠한 단색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화면에 몰입해서 붓질하는 화가의 행위에 예술적 가치를 둔다 해도, 그 산물인 그림에서는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어느 단색화가의 전시장에서 '표면의 깊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는 그동안의 무지함을 반성했었다. 물리적으로 1㎜도 안 되는 두께에 누적돼 있는 작가의 심상을 무한한 깊이로 교감하는 것이 단색화의 감상법임을 깨우친 것이다.
단색화의 매력인 표면의 깊이를 캔버스 밖의 현상으로 확장한다면, 건축과 도시의 경관을 이루는 주요 요소로서 논할 수 있다. 도시민은 다층적 외피와 시간이 누적된 재료로 구성된 건축 표면의 깊이에서 혹은 그러한 건축으로 형성된 거리를 산책하는 도시 체험에서 삶의 여유와 자기 존재의 서사를 얻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도시에서의 삶을 원한다. 그런데 도시 표면을 이루는 깊이의 측면에서 제주의 도시 모습을 진단해 보면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근대와 현대 건축으로 진화하는 지난 세기 동안, 건축은 표면의 의미를 상실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금속 커튼월의 발명은 건축기술과 재료의 관점에서는 혁신적이었으나, 전 세계의 도시가 급속히 유리 덩어리로 채워지며 경관의 정체성 상실을 초래했다. 건축의 표면에서 내·외부 환경을 구분 짓는 피막의 기능과 효율만을 남기고 깊이는 삭제된다. 제주의 도시 경관도 고층의 유리 빌딩들이 현대 도시의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아이덴티티를 자아낼 표면의 깊이가 없는 도시는 결국 시민의 삶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경제적 가치에 기반한 공간 소유의 욕망 또한 건축 표면의 물리적 깊이를 소거하는 주요 요인이다. 우리들의 삶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동 주거 건축에서 발코니가 사라진 것도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얇은 피막의 아파트 공화국이 표면의 깊이가 사라진, 현재 우리들의 안타까운 도시 풍경이다.
그런데 지금 제주는 피막의 도시에서 표면의 깊이가 있는 도시로 변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다. 첫째, 기후 에너지 산업의 최전선에서 건축의 전환은 표면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 예견된다. 둘째, 2027년에 시행 예고된 고도 지구의 전면 해제는 주거 형식에서 발코니를 일정 비율로 의무화하고, 주차장에 빼앗긴 1층 필로티를 보행 친화형 프로그램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호재라 할 수 있다. 정책과 법 제도가 선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다음은 ZEB(Zero Energy Building)을 위한 다층의 외피와 재료의 쓰임, 고도 지구 해제에 따른 공간의 다양성 등을 활용할 건축가들의 몫이다. 새로운 도정의 혜안에 의해 제주가 '표면의 깊이'가 있는 도시로 변모하기를 기대한다. <양건 (사)제주미래 건축공간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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