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누군가에게 해야 할 삼키지 못한 말들을 글로 쓸 때 생각한다. 글이 된 이 마음들은 언제까지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보내는 이의 마음이 받는 이에게 온전히 닿는다면 가능할까. 그때가 되면 글로 남긴 마음들은 혹 주술적인 힘을 빌려 생명력을 얻게 될까.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가장 진실한 순간의 기록은 몸과 마음을, 말이 되지 못한 것들과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영구히 보관한다. 병 속에 담긴 편지의 기적들이 자연의 힘을 빌려 세월을 거슬러 마침내 수신인을 찾아낼 때 역사는 더 많은 페이지를 얻게 된다. 사사롭고 슬프고 아름다운 생명력의 언어로 쓰여진.
하비에르 칼보와 하비에르 엠브로시 감독이 공동 연출한 스페인 영화 <라 볼라 네그라>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에 첫 선을 보인데 이어 16회를 맞은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다시 한 번 개봉 전 관객들을 만났다. 1932년과 1937년 그리고 2017년이라는 세 시대를 배경으로 각각 카를로스, 세바스티안, 알베르토라는 세 명의 퀴어 남성이 겪는 이야기를 그려낸 <라 볼라 네그라>는 대서사시라는 말에 더없이 걸맞는 작품이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미완성 희곡인 <라 볼라 네그라>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적 상상력을 아낌없이 펼쳐낸 작품은 80년이라는 긴 시간을 넘나들며 관객들을 시대와 이야기 안으로 초대한다. 문학에 기반을 둔 역사 영화, 스페인 내전의 이면을 응시하는 전쟁 영화, 세대를 걸쳐 완성되는 퀴어 멜로, 몽환적인 동시에 선언적이기도 한 뮤지컬이라는 각기 다른 장르를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 타임 안에 정교하고 섬세하지만 대담하게 수놓는 <라 볼라 네그라>는 영화적 야심과 작가의 진심을 동시에 탑재한 채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영화이기도 하다.
목적은 분명하다. 발신인이 남긴 글을 수신인의 마음에 닿게 하겠다는 것, 2017년의 퀴어 남성인 알베르토가 세바스타안과 카를로스 그리고 라파엘이 마음으로 토해낸 편지를 받는 이가 된다. 알베르토에게 세바스티안은 이어져 있지만 알지 못했던 이고 카를로스와 라파엘은 알지 못했으나 이어져 있는 이다. 퀴어 정체성의 맥박이 세월의 지층 아래에서 수면 위로 솟구치는 조응의 감각을 <라 볼라 네그라>는 뭉클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 아름다움은 변색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사랑의 필체의 온전한 전달로써 가능한 감각이다. 마침내 알베르토의 손에 닿은 그때의 마음들이 스크린 위에 다시 살아날 때 영화를 마주한 관객들 또한 이 사랑의 역사의 수신인이 된다. 받은 이가 해야 할 일은 다시 누군가를 찾아 전하는 일이다. <라 볼라 네그라>는 '검은 공'이라는 뜻으로 차별과 거절의 모양을 뜻한다. 영화의 후반부 흰 눈으로 덮인 자리에서 잠들어 있던 사랑이 깨어나는 순간, 빛으로 어둠을 몰아낸 곳에서는 어떤 이의 사랑도 영원히 잠들지 않음을 보았다. 나 또한 역사의 목격자이자 전달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