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57)중문동 녹하지 주둔소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57)중문동 녹하지 주둔소
주둔소 옛터에서 들리는 수난과 한의 소리
  • 입력 : 2008. 09.23(화) 00:00
  • 최태경 기자 tkchoi@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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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지 주둔소에서 바라본 한라산 전경. 무장대의 동양을 관축하기에 용이하다.

녹하지 주둔소로 찾아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골프장을 지나야 한다. 중문동 북쪽 녹하지 오름 앞에 있는 알오름 정상에 고대 유적처럼 시커먼 석성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있다. 1950년 겨울 경찰이 지휘하에 중문리, 회수리, 색달리 등 인근 전 주민이 동원되어 피눈물로 주둔소 성을 쌓았다.

이 주둔소는 이때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토벌대의 주둔지 석성 중에는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제주4·3의 대토벌기인 48년 겨울부터 49년 봄 사이에 제주도군경합동사령부는 마을주민들과 무장대의 연계를 막기위해 중산간 마을마다 주민들을 강제동원해 성을 쌓기 시작했다.

또 무장대에 대한 방어와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한라산 밀림지대와 중산간 마을 사이 주요 지점마다 주둔소를 구축했다.

산남 서부의 토벌 전초기지

이러한 주둔소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한라산 해발 600m 고지를 원형으로 돌아가며 개설한 이른바 '하치마키' 도로를 따라 만들어 지기도 했으며,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장대와 주민들의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는 높은 지형이나 오름 등지에 세워졌다.

주둔소에는 경찰과 마을에서 강제로 차출된 청년들이 보초를 섰으며 토벌군인들이 임시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서귀포 경찰서 관내에는 녹하지 주둔소를 비롯하여 모라이 오름, 법정오름, 시오름, 쌀오름. 수악 등지에 주둔소가 속속 구축되었다. 이 가운데 서귀포시 중문동 녹하지 주둔소는 인근의 시오름 주둔소와 함께 현재까지도 그 형체가 잘 남아있다.

겹담으로 단단하게 쌓여진 녹하지 주둔소에는 제100전투경찰사령부 소속의 경찰토벌대가 1954년 4·3이 종결될 때까지 주둔했다. 이 곳은 동북쪽으로 거린사슴과 법정악, 북서쪽으로 돌오름과 영아리오름, 서쪽으로 병악, 남서쪽으로 모라이악과 우보악을 선명히 관측할 수 있어서 4·3 초기부터 토벌작전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경찰100사령부의 마지막 토벌

1949년 3월, 2연대 1대대 4중대(중대장 김주형 중위) 군인들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주력부대를 이곳에서 섬멸함으로써 무장대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그 후 분산, 은거함으로써 무장대의 대규모 기습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잔여 무장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토벌활동에 참가한 경찰들은 산 속을 헤매며 숨막히는 생활을 했다. 당시 경찰의 몸에는 이가 북적였고 또한 쾌쾌한 냄새 때문에 경찰과 무장대가 구별이 안될 정도였다.

토벌작전 후 경찰의 전과품은 무장대의 목이었다. 경찰 토벌대는 무장대의 목을 자른 후 포대에 담아 가져오면 일 계급 승진이라는 포상을 받았다.

1950년도에 경찰에 지원한 김창근씨는 3년간 토벌활동에 참가했다. 녹하지 주둔소에도 근무했었다는 그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준다.

"부대장은 장석권이었다. 100사령부 산하 103부대는 전투경찰대였다. 중문 위 녹하지 주둔소에 주둔했다. 그 때부터 3년을 토벌 다녔다. 계속 주둔소에서 살면서 내려오지 못했다. 거의 산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부는 서귀포에 있었다. 거기서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관은 총경이었다. 그는 우리가 산사람과 똑같이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사람하고 같이 행동해야 산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위장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신상태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100사령부 보급에는 주민들이 동원된다. 집을 지어 나르는 것은 일반 주민들 몫이었다. 군인은 한 번 와서 우리와 같이 작전을 함께 했다. 그때 그들은 제주도 토벌이 지리산보다 어렵다고 했다. 3년간 토벌을 다니면서 폭도를 생포 하기도 했지만 우리도 동료를 많이 잃었다. 100사령부 내의 100부대는 서귀포 주둔, 101부대는 성읍(정의 쪽), 102부대는 성산포, 103부대는 녹하지에 주둔했다. 105부대는 다래오름에 주둔했었다. 우리는 합동작전을 벌였다. 서로 교차해서 만나는 작전으로 폭도를 잡는 것이었다. 우리가 녹하지 주둔소를 내려올 때 폭도가 한 5명 정도 남았을 것이다. 그 정도 됐을 때 철수했다. 나는 그 이후 쭉 경찰에 근무했다. 103부대는 모두 제주 출신 경찰들이었다. 처음에는 전투경찰로 많이 뽑았다. 그 이후에 의용경찰을 뽑기도 했다. 봉급은 적었다. 가족에게 식량만 줬다. 나는 입산해서 3년을 그냥 산에서 살았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었다."

피땀으로 쌓은 주둔소

평화로에서 1100도로를 연결하는 제2산록도로를 따라 중문동 잃어버린 마을 천서마을을 지나면 북쪽에 잘 깎아놓은 듯한 피라미드 모양의 녹하지오름이 보인다.

성 전체의 둘레가 120m 안팎의 사각형 모양이다. 주둔소 성벽의 높이는 약 3m이고 성밑 바닥의 너비는 1.5m 정도 겹담으로 단단하게 쌓여져 있다. 또 주변으로는 다른 주둔소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개별 호가 남아있다.

주둔소에 올라 남쪽을 내려다보면 산방산에서 서귀포 섶섬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한라산 쪽도 보여 감시하기에는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 오름 옆의 계곡 주변에는 무장대의 아지트였던 것으로 보이는 사각형과 원형모양의 터들의 남아있다.

무장대가 거의 소멸되는 1954년까지 존속돼 모진 역사를 지켜본 주둔소는 이제 개발의 바람에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녹하지 주둔소는 현재 골프장에 둘려 쌓여 자유롭게 들어 갈 수도 없다.

주둔소 돌담 하나하나에는 살기위해 발버둥쳤던 도민들이 처절했던 고통의 흔적이 서려있다. 60년 세월을 버티며 견뎌온 주둔소의 돌담은 도민들의 등에서 베어나오는 피가 스며있음을 느끼게 한다.

사라지는 고난의 흔적들

녹하지 주둔소는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2002년 레이크힐스 골프장 공사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를 받고 조사한 후, 이곳은 4·3성으로 보존이 요청된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녹하지 주둔소 성에는 회곽도가 설치되어 있고 모퉁이마다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 길이는 가로, 세로 각각 40여m, 높이 1~4m, 폭은 3m 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서쪽면은 현재 훤히 뚫린 채 성담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인근 목장에서 울타리를 쌓는데 성의 돌들을 이용하며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성 밖에는 깊이 1.5m, 폭1m 가량의 해자가 있다. 현재 그 주변에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데 그 당시 가시나무로 해자를 덮어 위장한 흔적이다.

한편 성밖 동남쪽에는 '보초막' 형태의 돌담이 둘러쳐진 움막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용도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화장실로 사용했던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녹하지 주둔소는 제2산록도로에서 레이크힐스 골프장 진입로를 따라 골프장에 들어가면 쉬 확인할 수 있다. 골프장 사무실 앞쪽의 조그만 오름이 알오름이고 그 정상에 주둔소가 있다. 알오름 북쪽에 위치한 오름이 녹하지오름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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