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3)-②꼬마탐험대(상)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3)-②꼬마탐험대(상)
탈진속 동굴 끝 확인하자 감격의 울음바다
제1부 부종휴와 꼬마탐험대
  • 입력 : 2009. 01.28(수)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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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만장굴을 찾은 어린이 관광객들. 어린이들은 만장굴의 최초의 역사인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이야기를 모른다. 이들에 대한 기록이 만장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장굴의 재발견은 바로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역사를 되찾아주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사진=한라일보 DB

해방후 김녕교 제자들로 '꼬마탐험대' 결성
1946년부터 1년간 암흑속 세계 뚫고 답사 성공
짚신에 횃불 의지 악전고투속 얻은 '경이적 사건'


▶꼬마탐험대 결성="제주도의 자랑은 지상에서는 한라산이지만 지하에서는 만장굴이 아닐 수가 없다. 필자가 그 만장굴의 발견자요 명명자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아직 만장굴 발견 당시의 이야기든 이 동굴이 각광을 받아 유일한 관광지로 등장하기에 이른 이야기는 한 바도 없고해서 여기에 몇마디 적어두는 바이다."(글 첫머리)

"만장굴의 발견은 1946년 부활제 날이었다. 이것이 첫 답사이며 제1입구 동북굴(630m)을 봤던 것"이다. 김녕에서는 옛부터 제1입구를 속칭 '들렁머리 굴'이라 불려왔다. 부종휴에 의해 지하에 감춰져 있던 동굴의 실체가 부활절에 되살아난 것은 수수께끼와도 같다. 부종휴는 서남쪽으로 뻗은 굴은 제2차 답사로 미루기로 해서 곧 꼬마탐험대(김녕국민학교 6년생)를 조직하고 다음주에 답사가 시작됐다. 이로 미루어 부종휴는 꼬마탐험대를 조직하기 이전부터 만장굴 사전답사를 진행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동굴의 길이와 높이, 온도만을 측량하는 작업이었지만 조명도구가 발달 안된 해방직후이고 보니 횃불을 쓰지 않으면 안되어 측량반, 조명반, 기록반, 보급반으로 나누어서 3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가 되었다. 부종휴는 꼬마탐험대를 가리켜 "일반은 꼬마탐험대라 하면 무시하겠지만, 비록 김녕 부근에 있는 20여개의 굴을 답사한 경험도 가지고 있고 한라산 까지도 갔다 온 멤버들"이라고 치켜 세웠다. 실제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스승인 부종휴를 따라 이미 한라산 등반에 동행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제1입구에서 300m쯤 들어갔을 때 실망을 하고 만다. 굴이 끝이 났기 때문이다. 탐험대는 돌아갈려고 망설이다가 혹시나 하고 굴벽을 살피다 보니 사람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만한 구멍이 보이지 않는가. 탐험대는 그 구멍을 한사람 한사람 빠져 나가보니 그로부터는 완전히 별천지였다. 그곳까지는 사람이 다니던 흔적도 없고 낙반도 많고 했지만, 그곳으로부터는 천장도 높고 폭도 넓어 자동차도 다닐 수 있을 만한 평탄한 밑바닥이었다.

"밑바닥을 자세히 조사해 봐도 아직 누구도 다닌 흔적도 없어 우리는 세기의 발자욱을 남기며 전진한다 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굴 입구에서 1.2km된 곳에 이르자 큰 낙반이 마치 큰 돌 동산을 이루는 곳에서 우리는 행동을 멈추고 정찰에 나섰다. 위를 쳐다보니 희미한 빛이 보였다(이곳이 지금의 제2입구임). 돌 동산을 막 올라서니 무엇인가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탐험대의 코를 자극한 것은 사람의 시체였다. 대원들은 혼비백산해져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린 대원들은 완전히 공포에 쌓여 있었다. 그 시체는 행방불명된 남자의 시신으로 판명됐다. 부종휴는 겁에 질린 어린 대원들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갔는데,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은 한바탕 소동이 나고 말았다.

▶3·4차 답사=이 일이 있고난 뒤 3차 답사는 일년후가 되었다고 부종휴는 회고한다. "소요되는 석유만도 80리터이고 횃불만도 50본은 가져야 하고 보니 적은 인원으로서는 도저히 안될 말이다. 1947년 2월말 어느 일요일에 제3차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제2입구(현재 일반에 개방되는 입구를 말함)에서 2km쯤만 측량을 하고 조명용 석유가 겨우 돌아갈 정도밖에 남지 않자 또 후퇴"했다.

4차 답사는 이로부터 한달후에 곧 실시되었다고 부종휴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마치 땅속을 향해 파들어 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번 답사에는 교사들도 끼게되고 해서 작업을 중단하고 돌아가자고 수차례에 걸친 반대에 부딪치자 꼬마탐험대의 인솔자인 필자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전 대원은 한 곳에 모여 앉아서 현 위치에서 절대 벗어나서는 안되며 횃불도 한개만 사용할 것'하고 지시만 내리고 나는 횃불 한개에 맥주병으로 석유 한병만 가지고 전진을 했다."

부종휴는 이 때를 술회하며 "왠지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박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명은 부종휴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굴 끝 200m도 안된 곳에 다른 대원들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동굴 끝에 도달한 것이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동백꽃도 피어 있었고 겨울딸기도 열매를 맺고 있었다. 우리는 끝을 봤다는 증거로 동백나무 가지를 한개씩 꺾고 되돌아 설 때 줄 자를 나무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본대가 가까워지자 끝을 발견했다고 외치자 저 쪽에서는 '거짓말'하고 메아리쳐 왔다. 그러나 동백나무 가지를 쑥 내밀자 만세하고 외치는가 하면, 감격에 넘쳐 서로 껴안고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지하에 이어 지상답사=대원들은 결국 4차에 걸쳐 동굴 끝을 봤지만 그 끝이 어디인가를 지상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남아 있었다. 다시 지도상에서 함몰된 곳을 찾았고 마을사람들에게도 물어본 끝에 5차 답사가 이어졌다. 5차 답사에서는 부종휴가 당시 강사로 나가던 김녕중학교 학생을 굴속에 투입하고, 꼬마탐험대는 지상으로 마을사람들이 일러준 '만쟁이 거멀'로 직행, 그곳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기 3시간만에 밑을 보니 사람이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환성이 터지고 결국 5차로서 굴의 끝을 확인하게 되었다."

부종휴는 다시 1973년 제주도지(제59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만장굴이 발견된 것은 1946년 부활주일날이었으며 그 다음해까지 4차에 걸친 답사와 측량으로서 6.4km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강조하고 있다. 변변한 측량장비도 없이 짚신을 신고 횃불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최악의 조건속에서 일궈낸 값진 성과이자 경이적 사건이었다.

만장굴의 전모에 대해서는 훗날 전문가 조사 등에 의해 다시 조정되지만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최초 답사에 이은 후속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자연유산 보고서에는 만장굴은 총길이 7416m, 최대 높이 25m, 최대 폭 18m로 정리됐다.



부종휴, 만장굴 최초답사 전모 밝혀

<1972년 제주도誌 '제주의 자랑, 만장굴' 기고>

▲만장굴을 발견해 최초 답사했던 주역들. 지금은 백발이 무성한 70대 노인인 이들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격에 젖는다. 탐사대장은 이들의 스승인 부종휴, 대원은 그의 제자들인 코흘리개 김녕국민학교 어린이들이었다. 부종휴는 이들을 '꼬마탐험대'라고 불렀다. /사진=한라일보 DB



부종휴는 해방직후인 1946년부터 그가 교사로 재직중인던 김녕국민학교의 어린 제자들을 이끌고 만장굴 답사에 도전한다. 만장굴의 실체는 현지에서는 '만쟁이거멀'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오는 등 까마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왔으나 암흑의 공간인 동굴의 세계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

부종휴는 그가 인솔한 제자들을 가리켜 '꼬마탐험대'라고 불렀다. 당시만 해도 제 연령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시대·경제적 상황이어서 나이로는 10대 중반의 늦깎이 국민학생들도 있었지만 '꼬마탐험대'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만장굴 답사는 무모하리만치 대단한 도전정신이 아니고서는 결행할 수 없는 모험이었으며 만장굴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만장굴에는 총 3개의 입구가 있다. 김녕에서는 제1입구를 '들렁머리굴', 제2입구를 '남생이 거멀', 그리고 제3입구를 '만쟁이 거멀'로 불려져 왔다. 지금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공간은 용암석주에서 제2입구까지이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이미 해방직후인 1940년대 후반에 제1입구에서부터 제3입구까지 만장굴의 전 구간에 대한 답사를 벌였다. 부종휴는 '만쟁이 거멀'까지 지하에 이은 지상답사를 마친 후 굴의 명칭을 최초로 '만장굴'로 명명했다.

부종휴는 1972년 제주도지(제56호)에 '제주의 자랑, 만장굴(萬丈窟)'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1년에 걸친, 최초 만장굴 답사와 발견 과정의 전모를 처음으로 소개한다. 제자들에 따르면 부종휴는 기록에 철저했었다고 한다. 이른바 발로 뛴 필드 기록장인 '야장'에 조사과정을 꼼꼼히 적어두었다는 얘기다. 제주도지에 남긴 '꼬마탐험대' 대장 부종휴의 친필 기록은 만장굴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생생한 육성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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