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제주외고. 이 건물은 2004년 북제주군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사진=진선희기자
1967년 개척단지였던 양잠단지 주민 열망으로 탄생
고성2리 초등생 증가속 옛 배움터엔 제주외고 둥지
"어느 학교의 개교식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가슴뿌듯한 기쁨과 즐거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이 상전 마을에서 4㎞ 떨어진 광령국민학교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학해온 어린이 여러분의 불편과 고통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80년 3월 6일. 상전분교장이 열리던 날 당시 양치종 교육감은 이런 격려사를 남겼다. 김하룡 북제주군교육장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가운데 귀여운 아들, 딸에게만은 의무교육을 시키기 위해 분교장을 설치하는 데 무척 애를 썼다"며 지역 주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초기 40세대 입주했지만 양잠업 실패
상전(桑田)분교의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12월 지금의 제주시 애월읍 고성2리에 양잠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인구 분산정책과 중산간 개발에 따라 진행된 개척 단지중 한 곳이었다.
1967년부터 2년에 걸쳐 40세대가 입주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시범양잠단지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양길로 접어든다.
고성2리 복지회관에 세워진 빗돌은 이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했지만 '광령국민학교 향토지'(1987)는 구체적 정황을 그렸다. 양잠을 주업으로 한 지 5년도 안돼 부실한 입주자 선정과 유류파동을 겸한 중국산 견사가 물밀듯 밀어닥치면서 주민들은 일손을 놓아야 했다. 단지를 떠나는 이들이 속속 이어졌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고 작물을 전환해 생계를 이어갔다.
뽕잎을 주며 누에를 기르던 양잠업의 쇠락은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1970년 제주도가 발간한 '도정평가보고서'는 "밭에 투자된 생산비를 양잠에 쓰면 밭 곡식에 비해 4배의 수익증대를 가져온다"며 "양잠은 단위면적당 수익성이 높고 판로가 보장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수출 산업으로 외화획득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란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같은 해 북제주군이 내는 '북제주'(67호)에 실린 '양잠단지의 문제점'은 도내 양잠업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짚었다. 이 글은 입주농가의 사업 의욕 저조, 만 3년이 지나야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특성상 사업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 노동력 부족, 교육시설과 의료 시설의 전무 등을 문제점으로 꼬집었다.
▲상전분교는 양잠단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제주교육박물관이 제공한 1980년 상전분교 개교식 장면.
▲고성2리 양정부씨가 제공한 사진으로 1970년대 초반 누에를 고르는 모습.
▶광령국민학교 교습소 거쳐 분교 설립
고된 시기였지만 양잠단지 주민들은 학교 설립에 대한 열망이 컸다. 1972년부터 분교장 설치 노력을 벌였고, 1974년 9월에는 광령국민학교 양잠단지 교습소 인가를 얻어 마을의 초등 1~3학년을 수용했다. 지금의 부녀회관 자리에 있던 교습소는 먼 거리 통학에 어려움을 느끼던 저학년 아이들에게 힘이 됐다. 상전분교 설립은 1979년 2월 추진위원회가 조직되면서 탄력을 받았고, 같은 해 5월 설립계획 승인이 이루어졌다.
일부 기록에 상전분교 설립 무렵 주민 1~2명이 부지를 기부했다고 하지만 '토박이'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첫 해 입주자인 양정부·강인종씨 등은 "양잠단지 주민들이 십시일반해 조성한 마을 광장의 일부를 상전분교 부지와 맞바꿔 기부채납했다"고 밝혔다. 마을에 뽕나무가 많아 4H 조직 등에 '상전'이란 이름이 곧잘 붙었는데 학교명도 자연스레 상전분교로 지어졌다.
상전분교는 학생수가 매해 감소하면서 1992년 광령초로 통폐합됐다. 침체기를 겪는 듯 했지만 서부산업도로(평화로) 확장은 마을 발전의 전기가 됐다. 도심과 한층 가까워지는 등 정주 여건이 나아지면서 '전원주택'이 하나둘 생기는 등 인구가 늘고 있다. 1998년에는 양잠단지라는 이름을 벗고 행정리인 고성2리로 새롭게 탄생했다.
3월 기준으로 고성2리에서 광령초로 통학하는 학생은 26명이다. 폐교 당시와 비교할 때 3배 많은 숫자다. 상전분교 터에는 지금 '북제주군건축상 최우수상'(2004)을 받은 제주외국어고 건물이 서있다.
2020비전 도약 꿈꾸는 제주외고 "그대, 세계의 등불 되리"
토요휴업일을 하루 앞둔 금요일 오후. 제주외국어고를 오가는 자가용들이 줄을 이었다. 주말을 맞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려는 부모들의 차량 행렬이었다.
상전분교장이 있던 자리에 문을 연 제주외고는 '글로벌 인재 양성의 요람'을 내세우고 있다. 2004년 개교 이래 지금까지 5회에 걸쳐 46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과는 영어·중국어·일본어·스페인어과 등 4개과. 2008년 학교평가 최우수학교, 2010년 대입수능 표준점수 도내 1위, 교육과학기술부 '대한민국 좋은 학교' 표창 등 특수목적고로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학교다. 모집 정원은 100명. 근래에는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을 두고 과별 5명씩 20명을 선발하고 있다.
▲제주외고는 2020년 비전을 통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사진=제주외고 제공
'빛나는 그대, 세계의 등불되리'를 모토로 내건 제주외고는 2020비전을 통해 앞으로 2020년까지 국제화교육프로그램 운영, 영어영재교육 실시, 국제수요에 대응하는 학과 개편 증설, 국제교류 센터 설립, 국제표준교육과정 도입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제주외고 부지 선정 무렵 폐교된 회천분교장과 경합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치단체장의 유치 노력과 더불어 상전분교장이 회천에 비해 면적이 넓고 교통편이 좋아 최종 부지로 결정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주외고엔 '배움의 옛 터'처럼 상전분교의 흔적을 말해주는 빗돌 하나 없다.
학교측은 애월읍에 둥지를 튼 덕분에 이점이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학비다. 읍면 지역 소재 학교여서 상대적으로 수업료가 낮게 매겨진다.
이영운 교장은 "우수학생 입학이 갈수록 늘어나는 등 비전을 갖춘 학교"라면서 "영어도시 국제학교와 차별화된 토착학교로 학부모의 부담을 덜면서 질좋은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만큼 성남시 등 다른 지역의 외고처럼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양잠단지 '원주민' 강인종씨 "신혼부부로 단지에 첫 발, 머잖아 뽕나무 부활할 것"
"이제는 살만해졌다. 양잠산업이 실패했을 때만 해도 크나큰 좌절을 맛봤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2리 강인종(65·사진)씨. 광령2리 출신인 그는 양잠단지가 조성되던 해인 1967년 이 마을에 정착해 지금껏 40여년을 살고 있다. 현재 고성2리에 거주하는 양잠단지 첫 해 입주자는 강씨를 포함 강인현(76)·양정부(72)씨 등 세 명에 불과하다. 신혼이었던 강인종씨는 당시 막내뻘로 양잠단지에 첫 발을 디뎠다. 누에에게 뽕잎을 주느라 밤잠도 제대로 못자는 나날이었지만 머지않아 큰 돈을 벌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양잠단지는 10년도 안돼 내리막길을 걸었다. 주민들의 고통은 날로 커갔다. 땅 3.3㎡(1평)이 30원이던 시절에 25만5000원을 빌려 뽕나무 키울 밭이며 주택 부지를 사들였는데 그 돈을 갚기가 수월치 않았다.
"너도나도 양잠단지를 떠나갔다. 나도 그때 갈팡질팡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금세 쓰러질 것 같았던 마을이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았다. '고성리지'(1993)는 양잠업의 몰락 이후 지역 주민들이 "소, 사슴, 토끼, 토종닭, 감자, 채소 등으로 작목 전환을 해서 부흥을 일궈갔다"고 기록해놓았다.
마을에 시련을 안겨준 뽕나무지만 최근 이를 새로운 소득작물로 키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강씨는 "지난 봄에 고성2리 주민 10여명이 참여한 웰빙영농조합법인에서 뽕나무 400그루를 심었다"면서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