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폐교된 제주시 조천읍 신흥분교는 현재 제주도교육청이 운영하는 제주다문화교육센터로 변신할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1964년 재일본 신흥초 설립추진위 구성 39명 총 720만원 조성
배움의 옛 터 한켠에 45년 학교 발자취 모은 역사관 조성키로
"학교가 사라지면 기부채납한 노력들이 유명무실해진다. 우리 조상들이 먹을 것 안 먹으면서 자손들 잘되라고 지어놓은 학교 아닌가."
2009년 여름, 제주시 조천읍 신흥분교 통폐합을 놓고 마을 주민들이 수차례 회의를 이어갔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가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속에서 누군가 신흥초의 탄생 배경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함덕고 이설때도 토지 매입 지원
설촌 이후 주민들의 오랜 바람중 하나는 학교 설립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흥리 아이들이 2㎞쯤 떨어진 조천초등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해야 하는 불편을 지켜봐야 했던 탓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년동안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신흥리 출신 재일동포들이 힘을 보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흥리지'(2007)에 따르면 고향에 들렀던 재일동포들에게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적극 알린 게 계기였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재일본 신흥초등학교 설립추진위원회'를 꾸렸다. 학교설립에 필요한 소요 예산 전액을 재일본추진위원회에서 모으기로 했다. 그때가 1964년이다.
▲신흥초 제1회 졸업생 사진. 신흥초는 1983년 분교장으로 개편됐다. 조천초에서 제공한 사진이다.
한햇동안 재일동포 39명이 1인당 170만원에서 5000원까지 십시일반 참여해 '거금' 720만원이 조성됐다. 그해 6년제 3학급의 신흥국민학교로 인가받고 지금의 학교부지를 사들였다. 개교는 이듬해 3월 9일 이루어졌다. 첫 해 입학생은 132명이었다.
재일동포들은 개교 이후에도 학교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3학급 복식 수업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강사를 채용해 6학급 단식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때 재일동포 기성회의 도움이 컸다. 신흥초는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기성회비를 걷지 않는 학교로 출발했다.
함덕중·고교가 분리되면서 지리적으로 조천읍의 가운데에 위치한 신흥리로 고교를 이설할 때도 토지 매입 등 재일동포들의 지원이 이어졌다. 함덕고는 1978년 신흥리 부지로 학교를 옮겼다. 신흥초 운동장에는 현재 재일동포의 공적을 기리는 총 10기의 빗돌이 세워졌다.
▲운동장 한켠에 세워진 재일동포 공적비.
▶본교로 개교해 1983년 분교장 개편
하지만 신흥초는 1983년 분교장으로 개편된다. 1997년 6년제 3학급, 1999년 4학급, 2000년 5학급으로 차츰 여건이 나아지는 듯 했지만 복식수업이 이어지면서 통폐합 대상으로 오르내렸다. 2010년에는 학생수가 11명으로 줄어드는데다 3복식 수업이 예상되면서 통폐합이 불가피해졌다.
마을에서는 학생수를 확보하기 위해 2년여동안 이른바 '학교 살리기'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부 학부모들은 "3복식 수업은 안된다"며 통폐합하는 게 낫다는 입장을 보였다. 2001년 지금과 같은 외양으로 산뜻하게 탈바꿈했던 학교는 결국 2010년 문을 닫았다. 재일동포들의 재정적 지원만이 아니라 마을 주민 등이 한데 참여해 주변 울타리와 환경을 정리해 문을 열었던 학교였다.
다문화교육센터로 탈바꿈하게 될 옛 신흥초에는 여느 폐교와 달리 해당 학교의 역사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신흥초총동문회는 폐교에 지원되는 인센티브 예산중 일부를 떼어내 다문화교육센터 한켠에 학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기로 했다. 건물만 간신히 남아있는 폐교가 아니라 그 속에 숨쉬던 여러 사연을 널리 알리고 싶은 뜻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초대 동문회장 지낸 김태웅씨 "교육기관 명맥 이어 다행"
"타국에서 어렵사리 번 돈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어떻게든 교육 기관으로 명맥을 잇자는 주민들이 많았다."
초대 신흥초등학교 총동문회장을 지낸 김태웅(사진·59·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씨. 그는 옛 신흥분교에 들어설 예정인 다문화교육센터를 놓고 얼마전 제주도의회에서 왈가왈부했던 일을 꺼냈다. 당시 다문화교육센터의 입지 조건 등을 두고 일각에서 말이 나오자 동문회를 주축으로 제주도교육청과 도의회에 항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폐교를 결정한 마을 총회에서 학교를 개인에게 임대하지 않고 교육기관을 유치해 활용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유아교육진흥원, 청소년수련원, 평생교육시설 유치 등을 희망했는데 결국 다문화교육센터로 결정이 난 것이다. 논란이 있었지만 다문화교육센터 건립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어서 다행스럽다."
김 전 회장은 신흥초 1회 졸업생이다. 학교 건물이 세워질 때 신흥리 출신 재일동포들이 너나없이 건립 비용을 지원했지만 주민들도 직접 울타리를 쌓는 등 노동력을 보탠 일을 기억하고 있다.
총동문회는 2008년 새롭게 결성됐다. 마침 신흥분교가 통폐합 대상으로 거론될 때여서 "학교가 문을 닫을지 모르는데 이제와서 동문회를 만들어 뭣하나"란 반응도 있었다. 동문회 등이 참여한 '학교 살리기'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모교가 폐교됐지만 동문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다문화센터 변신 채비
리모델링 공사 이르면 12월 개원
옛 교실은 무인경비시스템이 지키고 있었다. 현재 관리를 맡고 있는 조천초의 도움을 얻어 옛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행복한 신흥가족 만들기'란 글귀가 쓰여진 교무실 칠판은 신흥분교의 마지막 어느 시간에 멈춰있었다. 1학년 1명, 2학년 1명, 3학년 1명, 4학년 4명…. 총 학생수 17명. 통폐합 대상의 기준이 되는 분교 학생수 20명을 넘기지 못한 탓에 결국 문을 닫았던 학교의 지난날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거기에 그대로였다.
신흥분교장은 제주다문화교육센터(가칭)로 변신할 채비를 하고 있다. 당초 지난 9월 개원 예정이었지만 관련 절차가 늦어지면서 오는 12월 중순 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신흥초 운동회 장면.
다문화교육센터 건립은 양성언 교육감의 주요 공약중 하나다. 제주도교육청은 제14대 제주도교육감 공약 실천 계획을 통해 '다문화가정 자녀의 학교 성적 저하와 부적응 문제 해결, 외국의 다양한 문화 존중과 이해, 다문화가정 자녀의 이중 국가 정체성 확보' 등을 목표로 다문화교육센터를 짓는다고 했다.
건립 예산은 5억원이 넘는다. 옛 학교 외양은 그대로 둔 채 내부를 고쳐 다문화교육센터를 짓는다. 외부 공모를 거친 다문화책임연구관 등 4명이 상주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할 예정이다.
도교육청은 "도내 다문화 관련 기관이나 단체와 중복을 피하고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면서 "제주의 다문화정책을 세우고 연수하는 다문화교육 전문기관으로 키워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