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춘 칼럼]'毒舌'은 과연 필요악인가

[김계춘 칼럼]'毒舌'은 과연 필요악인가
  • 입력 : 2012. 02.07(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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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조지 버나드 쇼는 1925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 그러나 우리에겐 '유쾌한 독설가(毒舌家)'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묘비명(墓碑銘)도 그의 유언에 의한 것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무용수인 이사도라 덩컨의 청혼에 "내 육체와 당신의 머리를 가진 아이라면 얼마나 끔찍할지…"라는 답변은 버나드 쇼의 유명한 일화(逸話) 중 하나다. 어느 날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무작위로 "다 들통 났음. 빨리 도망쳐라"는 전보를 보내 영국을 일시에 마비시킨 장본인도 바로 그였다. 버나드 쇼의 독설 속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 유머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 '독설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몇년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대중문화 전반에 '독설'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주인공 강마에가 쏟아냈던 똥덩어리나 구제불능, 쓰레기 등의 막말은 상대의 눈물을 쏙 빼놓는 동시에 자존심까지 마구 짓밟았다.

그런데도 대중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마에에 열광하며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그의 독설은 당장은 아프고 쓰리지만 새 살을 돋게 하는 항생제라는 것. 나약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막연한 환상보다는 쓰디쓴 독설이라는 이유도 곁들였다.

이같은 '독설 바이러스'는 최근의 오디션 프로그램 등 대중문화까지 감염시켜 김구라나 방시혁 등의 '독설 스타'들을 탄생시켰는가 하면 사회전반에도 그대로 파급되어 이제 독설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전천후 비평가'인 진중권을 거쳐 팟캐스트 '나꼼수'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한때 진중권은 '진보 논객'의 대명사였다. 치밀한 논리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공세는 파죽지세였다. 이른바 '수구꼴통' 세력은 물론 표적이 된 대상들은 그 통쾌무비한 독설 앞에 무참히 스러졌다. 열렬한 환호 속에 적과 동지가 따로 없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과 전교조, 심지어 '나꼼수'까지 그의 독설에 올랐을 땐 필자 역시 그 '용기'에 감탄했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진중권은 어느새 '싸움닭'으로 변해 버렸고, 이제 그가 쏟아냈던 독설은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돌아오고 있다.

국내 유일의 '가카 헌정방송'을 표방하고 있는 '나꼼수' 또한 예외는 아니다. 현재의 인기에만 도취되어 스스로에 대한 정화 없이 오로지 '적'을 '까는' 데에만 주력한다면 말 그대로 '꼼수' 그 자체로 끝날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증오와 분노를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켜야지, 풍자와 해학으로 증오와 분노를 일으켜선 안된다"는 진중권의 말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만 하다.

독설은 대부분 억눌린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권력이나 기득권을 향해 거침없이 퍼붓는 독설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속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그들 속에 내재된 위선(僞善)과 가식의 가면을 가차없이 발가벗겨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설이 횡행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독설은 '미학(美學)'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상대의 상처를 후벼파는 막말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날카로운 독설 이전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한다. '독설의 시대'에 새삼 버나드 쇼의 해학과 풍자, 유머가 그리운 이유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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