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회항(回航)'으로 온나라가 시끄럽다. 아니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지시로 비행기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은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그 모욕감과 인간적인 치욕(恥辱), 겪어보지 않은 분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논란의 와중에서 회사측은 '모든 잘못은 그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무원들에게 있었고, 그것을 지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때 박 사무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지. 나의 자존감을 다시 찾아야겠다. 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것은 아니다."
또 "많은 고통과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만 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자존감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창진 사무장은 각종 인터뷰에서 유난히 '자존감'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 국어사전을 보면 '자존심'은 있지만 '자존감'이란 단어는 없다. 자존심(自尊心)의 사전적 뜻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혹은 높이려는) 마음'이다. 자기계발서 등을 통해 이제는 일반화된 '자존감'은, 애써 풀이하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긍심(Self-esteem)의 낯선 표현으로 보면 무방하다.
자기계발론자들은 '자존심 vs 자존감'의 비교 모델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을 곧잘 거론한다. 명문가 출신의 항우는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영웅으로 70번의 싸움에서 한번도 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해하의 전투'에서 유방군에 패한 후 이내 좌절하고 만다. 다시 재기를 하려고 하면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패한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역사의 패배자(敗北者)가 되고 말았다.
반면에 유방은 미천한 건달 출신으로 뭐 하나 변변한 재주가 없었다. 대신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항우에게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도 결코 포기할 줄 몰랐다. 과거를 불문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힘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인격 또한 형편 없었던 유방이 초패왕(楚覇王) 항우를 꺾고 천하를 제패한 것은 그 저변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강한 '자존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땅콩 회항'으로 돌아가 보자. 재벌 3세인 조현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잘못된 가정교육에다 '시건방진 자존심'에 있었다. 그 정도의 위치가 되면 '긍지를 갖고 스스로 존중하며 자기의 품위를 지키는' 자존심을 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만 높이려고 잘난 체 함으로써 본인은 물론 가문까지 깊고 깊은 나락(奈落)으로 빠트렸다.
'땅콩 회항'을 둘러싼 파문이 가라앉지 않은 가운데 이번엔 '대한민국여성단체연합'이 또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여성연합은 최근 '마녀사냥 언론 호들갑, 조현아 죽이기 그만하자!'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하이에나에게 먹잇감을 던진 꼴" "재벌 딸 죽이기 굿판을 중단하라" 등등 운운하며 조현아 옹호하기에 나섰다. 수퍼 갑(甲)의 몰상식적 횡포라는 본질은 외면한, 참으로 한심하고 무서운 인식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남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돌아보길 바란다. <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