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춘 칼럼]제주 첫 순교자 '福者 김기량 현양대회'

[김계춘 칼럼]제주 첫 순교자 '福者 김기량 현양대회'
  • 입력 : 2014. 11.25(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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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사도 권위로 가경자(可敬者) 하느님의 종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앞으로 '복자'라 부르고,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지난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諡福式)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포한 내용 중 일부다.

이로써 제주 가톨릭의 첫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복자품에 올랐다. 가톨릭에서 복자(福者)는 성인의 전 단계로 준(準)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백십수년의 전통을 지닌 제주 가톨릭의 큰 경사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김기량(1816~1867) 펠릭스 베드로는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복음을 접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보인다. 1857년 그의 나이 41세 때, 바다로 나갔다 풍랑을 만나 동료들을 모두 잃고 표류하다가 중국 광동해역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인계된 곳이 홍콩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였다.

마침 그곳엔 병으로 휴양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가 있었다. 난생 처음의 천주교리(天主敎理)도 그에게 배웠다. 그 후 루세이유 신부에게 펠릭스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아 제주도 출신 첫 번째 신자가 됐다.

1858년 5월 의주를 거쳐 조천 포구를 통해 제주로 돌아온 김기량은 우선 가족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제주의 천주교인은 한때 40여명으로 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제주에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 공동체 형성 및 전례행위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사제 없이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한국 교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오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도 탄압 사건인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그도 피해가진 못했다. 박해가 일어난 1866년 10월 무역을 하러 경상남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천주교 신자란 게 밝혀져 관아에 체포된다. 그 후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7년 1월 통영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殉敎)했다.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기량의 순교가 제주 가톨릭 신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판단, 지난 2000년 '시복시성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 자료집 발간을 비롯해 순교현양비 건립과 순례길 개장 등도 그 일환이다. 이같은 노력은 올해 8월 시복식으로 이어졌고, 제주교구 첫 영세자이자 순교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복자'로 탄생하는 아주 뜻깊은 결과를 낳았다.

오는 11월 30일 제주시 한라체육관에서 열리는 천주교 제주교구의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 현양대회'는 복자 탄생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날 현양(顯揚)대회는 교구 내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 등 모두 5000여명이 참석 '순교신심'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할 것을 다짐한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한 이기(利己)주의 및 물질 만능주의로 인간과 가정이 황폐화되고 생명환경이 멸시되는 현 세태와 관련, 정신적 쇄신의 힘으로 맞서 싸울 것을 선언할 예정이다. 지역사회에 새로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지는 제주 가톨릭의 순교 현양대회가 주목되는 이유다. <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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