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부종휴(1926~1980) 선생이 제주땅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 크고 넓다. 한라산은 그가 젊음과 인생을 불사른 열정의 무대였다. 200여회의 산행 속 한라산에 그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알려지지 않았던 미기록 식물 333종을 찾아내 발표하는 등 한라산 식물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왕벚나무 자생지 발견 등 학술·자원조사에도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자연유산인 만장굴(萬丈窟)의 역사도 부종휴에 의해 비로소 시작됐다. 지인(知人)들이 그를 가리켜 '제주의 큰 산'이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주저없이 부르는 이유다.
부종휴와 만장굴의 인연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녕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꼬마탐험대'라 이름 붙인 어린 제자들을 이끌고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미지(未知)의 굴' 탐사에 나섰다. 실로 무모하리만큼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부종휴를 단장으로 한 '꼬마탐험대' 30여명은 그 후 1년간 5차에 걸친 답사와 측량을 통해 7㎞에 이르는 굴의 전모를 밝혀냈다. 이 굴을 '만장굴'이라 명명(命名)한 이도 바로 부종휴였다. 우리나라에서 동굴에 관한 본격적인 조사가 1950년대 후반에 이뤄졌음을 감안하면 당시로선 '대단한 사건'이었다. 세계 최장 용암동굴(1만 3268m)인 만장굴은 부종휴와 꼬마탐험대의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그 '태고(太古)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냈다.
그러나 세계자연유산 및 세계지질공원의 초석(礎石)이 된 '불굴의 탐험사'는 그 흔한 기념비조차 없이 이제 '잊혀진 역사'로 방치되고 있다. 당시 '꼬마탐험대'의 일원으로 만장굴 답사에 나섰던 김두전씨(전 농협중앙회 지점장) 등 옛 제자들은 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만장굴을 개척하신 선구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어요. 부종휴 선생님과 우리가 이 굴을 어떻게 개척했는지 안다면 이렇게 박대할순 없지. 국민학생이던 우리를 데리고 짚신에 횃불 하나 달랑 들고 만장굴의 문을 열었던 것이야. 그런데 만장굴 어디에도 공적비(功績碑)는 커녕 선생님 이름 석자도 보이지 않아."
만장굴이 켜켜이 쌓인 신비를 안고 세상에 나온지 올해로 6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선생이 고인(故人)이 된지도 수십년이 됐다. 옛 제자들 또한 80고개에 접어들며 생존자가 몇 안된다. 이들의 '마지막 변(辯)'은 "늦게나마 선생의 공적을 증표할 기념비 등을 건립해 말 없이 잠들어 있는 선생님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세에 영원히 빛날 탐험정신을 유산으로 남겨달라"는 것이다.
제주자치도는 노익장들의 '숙원(宿願)'을 결코 가벼이 들어선 안된다. 부종휴 선생이 제주땅에 남긴 업적과 공헌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건립중인 세계자연유산 홍보전시관에 기록만 단순히 전시하는 것은 합당한 예우라 할 수 없다.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선 만장굴 경내에 기념비 및 동상을 건립해 '살아있는 역사'로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욱이 '꼬마탐험대'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기막힌 스토리텔링이 아닌가.
한국전쟁 때 1년간 피난왔던 이중섭 화가는 미술관과 거리까지 만들며 그토록 기리면서 제주의 선각자(先覺者)를 홀대·방치하는 것은 우리의 소중한 역사에 대한 '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