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춘 칼럼] 어느 시인의 편지와 '강정'의 오늘

[김계춘 칼럼] 어느 시인의 편지와 '강정'의 오늘
  • 입력 : 2012. 03.13(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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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강정의 '게토'로 오십시오'- 인터넷에 띄운 어느 시인의 편지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멀리 계시는 그대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는 조정(한국작가회의 여성과인권위원장) 시인이 해군기지로 고통받고 있는 강정마을의 현실을 참담한 심정으로 담았다.

시인은 '강정'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쓰고 있다. "잡목 숲이 연두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마을 초입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제주해군기지 건설 공사장 입구를 지나쳤습니다. 저를 낚아챈 '강정의 혼(魂)'이 더듬더듬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저는 그날 강정이 저에게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집집에 꽂힌 노란 깃발들의 침울한 안색이 민망하였을 뿐입니다. 감귤이나 백합꽃 키우던 곳이 분명한 폐비닐하우스들은 더욱 서늘했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강제 수용된 토지들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을 강정으로 부른 게 '구럼비'였다고 밝혔다. 사납지 않은 너른 바위가 곳곳에 크고 작은 쉼터와 물샘을 풀어놓은…, 제주해안의 용암 바위 중 사람을 편안하게 품에 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구럼비라는 것. 한라산을 달려 내려와 흰 파도와 만난 희열(喜悅)을 그대로 드러낸 구럼비의 수만 가지 표정을 당신에게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편지가 채 전달되기도 전에 '구럼비'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깨어지고 부서져 나갔다. '그대가 구럼비에 누워 창공에 뜬 낮달을 바라보지 않았는데, 그대가 범섬 앞에서 춤추는 고래떼를 보지도 못했는데…' 야만(野蠻)의 힘에 의해 하나 둘 폭파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일 구럼비 폭파를 시작으로 제주해군기지 건설공사가 강행되고 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보수언론의 공세 또한 한층 강화됐다. 폭파 다음날 중앙일보의 1면 톱기사는 '노무현의 대양(大洋)해군, 스위치 눌렀다'란 뜬금없는 제목을 달았다. 해군기지는 MB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시대의 유산(遺産)'임을 애써 강조한 것이다.

강정주민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지주이자 생명·평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해왔던 구럼비도 어느새 '흔하디 흔한 바위'로 둔갑했다. 해군기지를 둘러싼 색깔론 역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해군기지의 당위성을 위해 '제독(提督)의 눈물'(동아일보) 등으론 모자라 이번엔 '이어도'까지 끌어들였다. '한국 좌파, 이어도 바다도 중국에 떼주자 할 것인가'는 조선일보의 사설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색깔론 프레임 작동은 해군기지와 관련 각종 논란을 잠재우고 4월의 총선(總選)을 겨냥해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념적 잣대를 무기로 한 '색깔 덧씌우기'로 제주해군기지 문제의 본질(本質)이 희석될지는 미지수다.

강정마을엔 지금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부당국의 폭압(暴壓)에 맞서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의 맨몸 투쟁 또한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그 저변엔 과거의 '제주4·3'과 같은 뼈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단단하고 비장한 각오가 깔려 있다.

조정 시인의 편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아, 이곳은 바다로 가는 길들이 철조망과 이상한 법으로 차단된 '게토'입니다. 냉담한 이웃의 굳센 겨울을 녹이며 달려오실 당신에게, 평화와 비 개인 아침을 동봉합니다."

멀리 계시는 그대여, '강정'으로 달려오는 일은 아직도 늦지 않았다. <김계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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