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환경·평화운동가인 앤지 젤터(61·여)씨가 지난 21일 출국했다. 아니 출국(出國)이라기 보다는 '강제 추방'에 가깝다. 그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 반대활동을 하다가 공사 현장인 구럼비 해안 철조망을 끊었다는 혐의(특수손괴죄)로 체포되어 자진 출국 명령을 받았다.
젤터씨는 출국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평화적 시위 현장에 전투경찰 1000명 이상이 상주(常駐)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고 털어놨다. "영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부와 해군이 평화로웠던 강정마을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젤터씨는 '무기를 쟁기로 바꾸자'는 기치를 내건 영국의 반(反)핵무기 단체 '트라이던트 플라우쉐어즈(Trident Ploughshares)'의 설립자다. 지난 1999년 스코틀랜드 핵잠수함기지에 진입해 컴퓨터 시스템을 물에 던지는 활동으로 유명해진 뒤, 세계 각국에서 비폭력 평화·환경운동을 펼쳐왔다. 2001년 대안적 노벨평화상인 '바른생활상'을 수상한데 이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었다.
이런 젤터씨도 '한국적 상황(강정마을)'엔 절망하고 절규(絶叫)했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시위 진압과 관련 "한국의 공권력(公權力)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고 되물은 그였다. "체포된 후 출국 명령을 받기까지 스스로 변호하고 법적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며 한국의 사법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젤터씨는 런던의 주영 한국대사관 앞 항의 시위를 비롯 한국 정부에 항의 서한 보내기, 해군기지 시공사인 삼성과 대림에 대한 불매(不買)운동 전개 등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을 지속할 뜻을 내비쳤다. 조만간 외국의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오겠다는 약속도 했다.
젤터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강정마을의 상황은 지극히 우울하고 암울하다. 법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 경찰의 행태는 '4·3' 당시 이념을 앞세워 '소탕작전'에 돌입했던 우익(右翼)세력의 폭거를 연상케 한다. 그야말로 강압(强壓)과 윽박지르기의 전형이다.
국무총리실과 제주자치도가 가까스로 '시뮬레이션 결과 검증회의'에 합의했지만 해군측의 '구럼비' 폭파는 계속되고 있다. 오는 4월6일까지 약속한 보름여의 시간조차 못참아 화약을 마구 터뜨리는 '불장난'을 강행 중이다. 지난주 제주를 찾은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이 언급한 '소통과 협조'도 공염불이 됐다. 쇠귀에 경(經)을 읽더라도 지금쯤은 알아들을 터다.
손자병법의 첫 장인 '시계(始計)의 장'을 보면 전력(戰力)의 다섯 가지 조건으로 도(道)와 천(天), 지(地)와 장(將), 법(法)을 거론하고 있다. 그 첫머리인 '도'는 백성과 지도자가 소통하고 화합하는 것을 일컫는다. 백번 양보해 국가 안보상 해군기지가 꼭 필요하다 치더라도 이런 방식으론 안된다. 국방홍보원이 발간한 '국방저널'에도 강군(强軍)의 첫째 조건을 '국민의 신뢰와 사랑'으로 꼽고 있다. 지역주민과 철저하게 유리(遊離)된 군사시설을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거듭 간곡히 호소하거니와 해군 등 정부당국은 이제라도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해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모 대령의 '취중 발언'처럼 해군기지 반대세력을 '북한의 꼭두각시' 쯤으로 매도하는 현실 인식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