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 12월7일, 당시 서독 수상이던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무명(無名)용사의 묘를 참배하던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났다. 이같은 '돌발' 행동에 수상(首相)을 수행하던 보좌관들과 기자들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혹 피로 때문에 쓰러진 것은 아닐까' 등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훗날 빌리 그란트는 그날의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호텔을 나설 때부터 무엇인가 진심에서 우러나는 표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일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언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빌리 브란트의 진심어린 사죄(謝罪)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 국가의 오명을 씻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를 통해 주변국들의 신뢰도 회복했으며, 종국엔 독일 통일로까지 연결되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들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妄言)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 극우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일본유신회 공동대표)는 18일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학(自虐)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침략에는 정의가 없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는 발언의 연장선상이다.
이와 같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릴레이'는 국내에서 부는 '국수주의(國粹主義) 바람'에 편승한 바 크다. 그리고 그 선두에 아베 신조 총리가 있다. 아베는 망언과 함께 의도된 '돌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달 5일 아베는 됴쿄돔에서 열린 행사에 등번호 '96'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나와 논란을 부추겼다. 그 속엔 평화헌법을 고치기 위해 개헌 절차를 담은 헌법 96조를 손보자는 저의(底意)가 있었다.
한술 더 떠 아베는 항공자위대를 방문 '731'이라고 쓰인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훈련기 가운데 굳이 '731'기를 고른 것은 우연보다는 계산된 행동일 가능성이 크다. '731'에 담긴 의미를 아베가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
'731부대'는 일본 관동군의 악명 높았던 세균전(細菌戰) 부대다. 산 사람에게 서른 가지가 넘는 생화학 실험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중국인 등 3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한 후 일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못지 않은 잔혹상을 숨기려고 부대 건물을 부쉈다. 요행히 살아남은 생체실험자 400명은 화학가스로 살해했다. 시신을 분쇄기에 넣어 갈았고 일부는 태워서 묻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지른 게 731부대의 실상이다.
그런데도 아베는 '731'기를 타고 활짝 웃기까지 했다. 천박함을 넘어 일말의 동정심마저 느끼게 한다. 오죽하면 미국의 어느 교수가 "모든 사람의 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찔러버리는 것"이라고 맹비난했을까.
오는 7월의 참의원선거 등을 겨냥한 행태라 하지만 그 도(度)가 너무 지나치다. 정치인들의 망언과 망동(妄動)에 관대한 일본 언론이나 국민들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일본이 왜 아직도 '왜소국(矮小國)'이라 불리는지, '독일은 있되 일본은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