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2)/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2)언제부터 성을 쌓았나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2)/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2)언제부터 성을 쌓았나
탐라시대부터 이어진 제주역사의 DNA 결정체
  • 입력 : 2014. 01.22(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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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무근성 일대 항공사진. 제주성은 무근성 일대에 자리했던 탐라시대 고성에서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한라일보 DB

제주성은 방치된 역사… 실체규명 연구 거의 안돼
무근성 일대 성곽 사라지고 쇠락한 도심으로 변해


천년의 유산 제주성의 주요 정자였던 공신정 터에 제주기상청 신축이 추진되면서 학술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유서 깊은 공간에 공공기관 신축은 무관심속에 방치되다시피 했던 제주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탐라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성은 제주사의 DNA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파편처럼 남아있는 성돌 하나하나에서 굽이굽이 이어진 제주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제주성의 역사가 곧 제주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제주성은 방치된 역사다. 대부분 훼철되고 멸실된 상태여서 성곽 형태로 남아있는 구간은 극히 일부이다. 오늘날 성곽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은 제주시 오현단 일대 170여m 정도다. 언뜻 보기에 번듯하게 정비돼 있지만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상태여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나머지 성곽 잔존구간도 100여m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 훼손ㆍ멸실이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다.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제주성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훼철됐지만 그 후 불어닥친 도시화와 개발 바람은 성의 골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성곽에서 제주성의 기원을 찾기란 힘들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제주성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불모지 같은 여건에서 정비ㆍ보존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제주목도성지도'의 일부. 사진 중앙 파란 점선 안에 '진성' 표시가 나타난다.

제주성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성은 기본적으로 수성, 즉 지키는데 방점이 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제주의 경우에도 튼튼한 방비를 위해 성의 보수와 확장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성을 쌓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을 통제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이 갖춰져야 한다. 지배층이 등장하고 일정한 정치체가 형성돼 있어야 함을 뜻한다. 제주성의 기원은 탐라사회의 형성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탐라는 기원무렵부터 꾸준한 발전단계를 보여준다. 제주성을 관통하는 산지천 하류에서는 1928년 축항공사 때 '화천' 등 기원 전후의 중국제 화폐가 출토됐다. 이는 당시부터 산지항이 국제교역항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에 해당한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기원 후 3세기 말에는 제주를 지칭하는 '주호'가 중국측 역사서에 처음 나타난다. 이어 서기 476년에는 '탐라국'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661년에 이르러서는'탐라국왕'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탐라는 이때 일본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다. 이처럼 탐라는 비록 더디지만 꾸준히 진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주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기 961년에 편찬된 『당회요』「탐라국조」는 고대 탐라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성황(城隍)은 없다'라고 언급돼 있다. 이는 체계적인 성곽과 해자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아직까지 구체적 기록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제주성이 탐라국시대부터 시작됐음은 문헌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1481년) 제주목 고적조 '고성'(古城) 항목에는 '주성(州城) 서북쪽에 고성의 유지가 있다'고 언급돼 있다. 여기서의 '고성'은 제주성 이전의 '탐라고성'을 말한다. 오래된 성이라는 뜻의 '무근성'(묵은성)은 현재도 제주목관아 일대에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주성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축조돼 있었던 것이다.

▲탐라 옛 성을 의미하는 '무근성'은 현재도 지명으로 쓰이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은 또 있다. 1416년(태종 16년) 제주도안무사 오식 등은 제주를 3개의 행정단위로 나눌 것을 조정에 건의한다. 이때 제주성과 관련된 대목이 나타난다.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 한라산 사면에 모두 17개의 현(縣)이었습니다. 북쪽의 대촌현(제주시 원도심을 일컬음)에 성을 쌓아 이를 본읍(本邑)으로 하여…" 등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군을 설치하던 초기'는 언제일까.

제주는 1105년 고려 숙종 10년에 탐라군으로 편입된다. 독자적 지위를 누리던 탐라국이 고려의 군현체제에 편입되면서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군을 설치하던 초기는 바로 이 당시를 일컫는다. 고려시대에 이미 제주성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탐라의 수도, 즉, 수부(首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1408년(태종 8년) 태종실록에는 "제주에 큰 비가 내려 제주성에 물이 들어 관사와 민가가 표몰되고 화곡(禾穀)의 태반이 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성'이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헌이다.

옛 지도를 통해서도 '고성'의 존재는 확인된다.

1724년부터 1754년 사이에 제작된『제주목도성지도』에는 제주성 바로 북서쪽 바닷가 인접한 곳에 '진성'(陳城)이라 표시돼 있다. 진성, 즉 묵은, 오래된 성이 제주성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위치는 현재의 무근성 일대로 추정된다. 18세기 초까지도 '진성'은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천년의 유산 제주성의 시작을 알렸던 무근성 일대는 쇠락한 도심으로 변했다. '무근성'이라는 지명만이 옛 도읍지의 성곽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골목길은 한낮에도 한산하다. 어둠이 내리면 인적은 일찌감치 끊긴다. 당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옛 도읍을 감쌌던 성곽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수난 속에서도, 개발의 광풍이 불 때에도 위태하게 살아남아 생명력을 지탱하고 있다. 제주성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이다. 우리가 그 소중함과 가치를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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