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절강성 영파시 오주탑에서 바라본 초보산 위원성 성곽 건물과 영파시 전경. 사진=이윤형기자
기원 무렵 중국 화폐와 각종 청동기·철기류 및위세품에 이르기까지다양한 문물교류 이뤄져양 지역 교류사 규명 미흡
공동 연구 조사 나서
중국 절강성 영파시 동북쪽 바닷가. 이곳에 빼어난 경승으로 널리 알려진 초보산이 있다. 초보산은 해발 81.6m의 자그마한 산이다. 오주탑을 비롯 불교유적들이 자리하는데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위원성 등이 남아있어 관광여행구로 지정돼 있다. 산 정상부 능선에 서있는 오주탑은 7층에 8각
형 모양이다. 꼭대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오주탑은 초보산 관광여행구의 최고 경승지이기도 하다.
오주탑 하단부에서부터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영파시 일원과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오주탑에서 보는 영파항은 용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오가는 선박들로 분주하다. 바로 이곳이 고대부터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등지와 활발한 교류를 해온 해상무역
의 전진기지였다.
한반도와 제주도와의 교류도 이곳 영파를 통해 빈번히 이뤄졌다. 그 옛날 무역항으로서 번성을 누렸던 영파 해안은 오늘날 거대한 물류기지로 변했다. 영파시의 인구는 800만 명에 이른다.
제주와 중국간 교류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이는 결국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파성 남문.
제주도의 존재가 역사서에 처음 알려진 것은 기원 3세기 무렵이다. 중국측 역사서인 진수(223~297)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주호(州胡)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주호는 마한의 서쪽에 있는 큰 섬으로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중한(中韓)과 교류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주호가 과
연 탐라인가에 대해서는 일부 이론이 있지만 삼국지의 이같은 언급은 기원 2세기 이전에 이미 중국과 인적 물적 교류, 자본과 물류의 이동이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제주시 산지천 하류의 산지항. 이곳에서는 일제가 제주성을 허물고 바다를 매립하면서 제주항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때 제주와 중국과의 고대 교류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유물들이 발견됐다. 발견유물은 중국 신대에 발행된 30여종의 왕망전 중 오수전 4매, 화
천 11매, 대천오십 2매, 화포 11매 화폐 18매였다.
이들 화폐의 제작연대는 기원전 2세기 초에서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화천은 기원후 14년에 주조되기 시작해서 40년까지 정식으로 유통된 화폐이다. 화천은 산지항뿐만 아니라 애월읍 금성리와 구좌읍 종달리 유적에서도 각각 2점, 1점씩 출토됐다.
이러한 화폐유물의 발견은 제주도와 중국과의 자본물류이동이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사건이다.
영파성 남문 인근에 세워진 고려사관유지.
소주 명대거리에 골동품으로 나와 있는 고대중국화폐.
제주도와 중국간의 교류의 흔적은 절강성박물관과 영파박물관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절강성박물관에는 제주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화천 등 중국 고대 화폐들이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주도와 중국과의 교류 흔적은 화폐만이 아니다. 각종 청동기와 철기류, 그리고 한식유물등 다양한 문물이 도입된다.
삼양동 유적은 기원을 전후한 시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단위 마을유적으로서 국내외에 알려졌다. 이 곳에서는 청동검과 청동화살촉, 옥환, 유리옥이 출토됐다. 용담동 무덤유적에서는 철검과 철도끼, 철화살촉, 유리구슬 등이 출토됐다. 삼양동 고대마을유적이나 용담동 유
적 출토 유물은 대체로 상위계층의 위세품이나 의례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당시로서는 최고 지배층의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자 징표였다. 이러한 유물들은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 화폐 등 자본이동뿐만 아니라 물류교류도 활발히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늘날 제주와 중국간의 활발한 교류의
밑바탕에는 기원전후한 시점부터 이어온 양 지역간의 자본 물류의 이동이 있었다.
제주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 한반도와 일본 등과의 해상교역 등을 통해 발전된 정치체로서 탐라초기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 등과의 교류는 일찍부터 제주도가 주변부가 아닌 동아시아 해양문명의 중요한 거점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동인이 된다. 이는 기원
무렵 뿐만 아니라 국제자유도시를 추구하는 21세기 오늘날에도 해당된다.
기원 무렵 동전꾸러미에 불과했던 양 지역간의 자본교류는 오늘날 수조 원 단위로 늘어났다. 중국과의 자본 물류의 이동과 교류는 앞으로도 더욱 팽창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한다면 중국 등 주변과의 자본 물류교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부작용을 우려해서 무조건 외면하기보다는 부정적 측면을 개선하고 제주도의 미래발전전략과 연관시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심해야 할 시점이다. 오래된 미래가 오늘날 제주사회에 주는 의
미와 교훈을 되새겨봐야 한다.
이를 통해 제주와 중국과의 교류와 관련 문제점을 진단하고 한 차원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위한 해법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류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교류협력 시스템을 갖춰나가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절강성 영파박물관 리쥔 부관장 "양 지역 활발한 교류상 규명해야"
"고대부터 영파는 제주, 한반도와 많은 교류를 했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고대부터 이뤄진 양 지역간 교류상을 규명하는 일이 연구과제입니다. 양 지역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전문가와 관련기관간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절강성 영파박물관 리쥔(李軍·사진) 부관장은 영파는 고대 물류 중심지로서 현재도 중국 각지에서 물자들이 모여들고 해상을 통해 각지로 나가는 교역항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해상왕 장보고가 죽고 난 이후 영파는 해상무역이 크게 활성화돼 고대무역항으로서 번성을 누렸다고 말했다. 고대에서부터 중국 각지에서 한국 일본과 교류하려면 영파에 와서 해야 할 정도로 물류의 중심이었다고 설명했다. 리쥔 부관장은 하지만 박물관에는 한국이나 제주도보다는 일본쪽 자
료가 많다며 이는 활발한 교류가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규명하기 위한 양 지역의 연구가 미흡한 만큼 연구자료 교환 등을 통해 밝혀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