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춘 칼럼]화이부동(和而不同)

[김계춘 칼럼]화이부동(和而不同)
  • 입력 : 2014. 07.22(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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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화이부동(君子 和而不同) 소인 동이불화( 小人 同而不和)'- 군자는 조화를 이루면서도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뭉쳐 있기는 하나 화합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를 도모한다. 반면에 소인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같게 만들거나 또는 같아지려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최근 들어 '화이부동'이 새삼 부각된 것은 제주도교육청공무원노동조합(제주교육노조)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지난 11일 이석문 교육감을 방문해 간담을 가졌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화이부동'이란 휘호(揮毫)가 담긴 액자를 선물했다. 휘호는 2013년 공무원미술대전에서 대상(대통령상)을 받은 제주일고 조동호 교사의 작품이라 한다.

제주교육노조가 이 휘호를 전달한 이면엔 '다른 사람과 뜻하는 바, 이루고자 하는 바가 같지 않더라도 잘 화합(和合)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교육감 취임을 전후로 도민과 교육계 일각에서 불거지고 있는, '특정 단체 위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여론과도 무관치가 않다.

하지만 '화이부동'을 실천해야 할 사람이 어디 이석문 교육감 뿐이겠는가. 6·4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원희룡 제주지사나 도의원 및 교육의원, 이후 발탁된 행정시장에 이르기까지 '화이부동'은 저마다의 가슴에 깊이 새기고 행동에 옮겨야 할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진영(陣營)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다. 그 패거리 속엔 언론도 포함된다. 재·보궐선거와 관련한 '권은희 공천 파동'만 해도 그렇다. 논란의 와중에 객관적인 잣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주관적인 판단이 있을 따름이다. 자기와 뜻이 맞으면 '로맨스'요, 그렇지 않다면 '불륜'으로 매도하는 게 다반사다. 그러기에 그 어느때보다 '화이부동'의 정신이 요구되는 오늘이다.

'화이부동'의 화(和)는 각자의 견해나 주장을 하나로 잘 조화시켜 융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나와 다른 사람임을 전제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함께 아우르면서도 결코 군자(지도자)는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화이부동'은 프랑스어 '똘레랑스(Tolerance)'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똘레랑스는 관용·포용 등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여기엔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개신교간 '피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제각기 '신(神)의 이름'으로 같은 인간을 죽였던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의 비극에서 탄생한 '회개의 눈물'이 바로 똘레랑스다. 피로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기에 프랑스인에게 있어 똘레랑스, 즉 관용의 정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이성(理性)'으로 자리잡았다.

'새로운 변화'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원희룡 지사의 협치(協治)나 이석문 교육감의 새 교육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를 아우르고 밝은 내일을 열어나가기 위해선 각고의 인내와 끈기가 요구된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호흡을 다시한번 가다듬고 힘차게 기지개를 켜 보자.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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