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제주시장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결국 낙마(落馬)로 끝난 청문회를 보면서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그 속엔 '황희(黃喜) 정승'이라면 과연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상념도 끼어 있었다.
황희는 조선조를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吏)이자 명재상이다.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은 최장수 재상이기도 하다. 24년간의 재상(宰相), 그것도 19년을 영의정에 있으면서 조정의 모든 일을 관장하였던 황희는 대부분의 일을 공평무사하게 처리하였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배려와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황희 정승은 '청렴(淸廉)의 표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루는 세종이 그 집을 찾았는데 너무 초라했다. 방안엔 거적이 깔려 있었고 천정은 빗물이 새서 얼룩져 있었다. 대왕이 비용을 대줄테니 당장 집과 세간을 마련토록 지시하자 황희는 "나라의 녹을 먹는 선비가 옷과 비바람을 막을 집이 있으면 그만입니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황희 정승에 얽힌 일화(逸話)는 이외에도 숱하게 많다. 대부분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이야기들이다.
황희 정승은 오늘날까지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역사는 그의 다른 이면도 기록하고 있다. 세종10년 6월25일자를 다룬 '세종실록'에서 사관(史官)은 황희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황희가 한때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으로 불리며 비난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더 충격적이다. "황희는 박포(朴苞·조선의 무인으로 개국공신)의 아내와 통정(通情)을 하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황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관이 실록(實錄)에 기록할 정도라면 세종도 그 비리를 모를리 없건만 한결같이 황희를 특별 대우했다. 더욱이 황희는 세자였던 양평대군 폐위(廢位) 때 적극 반대 의견을 개진한, 즉 세종의 입장에선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즉위 후 귀양갔던 황희를 불러들여 복직시킨다. 당시 세종에게 필요한 것은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정치력이었다. 그만큼 황희에게는 비리사건조차 눈 감고 넘겨버릴 수 있게 만드는 정치력이 있었다. 그리고 보답이라도 하듯 최선을 다해 세종의 대업(大業)을 보필해 조선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기에 황희를 경원(敬遠)하던 사관들도 '개과천선'한 황희에 대하여 훗날 다음과 같이 호평을 남겼다. "성품이 지나치게 과대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생각이 깊고 함부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관후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중후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여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천하의 황희 정승도 제주시장 청문회에 임했더라면 '지난날의 과오와 허물'로 인해 아마 통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인사청문회 심판자로 나선 도의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터다.
제주자치도가 말 많고 탈도 많은 제주시장과 관련 세번째 전국 공모에 들어갔다. 누가 응할지는 모르지만 차제에 인사청문회 제도를 '신상털기'보다 자질과 능력검증 위주로 바꿨으면 한다. <미디어본부장 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