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제주출신 라오스 새마을협력관 홍정오씨

[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제주출신 라오스 새마을협력관 홍정오씨
어려웠던 시절 돌이켜보며 새마을운동 견인에 앞장
  • 입력 : 2015. 02.11(수) 0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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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오 새마을운동중앙회 새마을협력관은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새마을운동이 라오스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적극 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상윤기자

한·라오스 재수교 산증인… 민간외교관 역할도
학사이마을 세계화사업 시범마을 선정에 기여
"국민들 인식 전환위한 교육프로그램 병행돼야"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불리는 방비엥과 도시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루랑 프라방으로 최근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라오스. 인도차이나반도 중부에 위치한 라오스는 2008년 뉴욕타임스가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선정한 곳으로, 불교 국가답게 불교 유적이 많아 성지순례지로도 인기가 높다. 제주대학교 아라해외봉사단이 라오스 학사이마을에서 봉사활동을 위해 수도 비엔티안을 찾은 것은 지난 1월26일 새벽.

비엔티엔 공항에서 첫 대면한 홍정오 새마을운동중앙회 새마을 협력관(67)은 라오스와 새마을운동의 연관성을 찾는 관련 자료사진에서는 백발이었으나 검정색 머리여서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신원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그저 일상적인 대한민국 출신 촌부처럼 보였다.

제주시 출신인 홍 협력관은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에서 차량으로 2시간 가량 남쪽에 떨어진 학사이마을을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통해 비교적 넉넉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또 학사이마을이 새마을운동 세계화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된 것도 홍 협력관의 공이 컸다.

외국땅이었지만 홍 협력관과 서울말(표준어)로 얘기하는 것보다 제주사투리로 대화하는게 훨씬 수월했다. 그도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의 영향이 미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고국 동포들과 마주치는 기회가 많아졌다. 게다가 제주지역 새마을회와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제주 사투리를 쓰는 것은 특별할 게 없었다.

홍 협력관과 라오스의 인연은 지금부터 20년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과 라오스가 외교관계가 재개된 1995년 부터. 당시 국내에서 사업하던 홍 협력관은 라오스 대사로 임명된 외교관과의 인연으로 라오스 땅을 밟게 됐다.

홍 협력관은 라오스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6년 IMF사태가 터지면서 힘든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달러가치가 1/10이상 떨어지면서 참담했다. 이후 팔던 가전제품을 모두 처분하는데 2년 정도 소요됐다. 모든 게 정리된 후 라오스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라오스를 북쪽끝에서 남쪽끝까지 여행하겠다고 맘먹고 나섰다. 버스로도 수일 걸린다는게 홍 협력관의 얘기다.

그는 여행 중 일상에서 행복해하는 밀림가옥 거주민들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많은 점을 깨우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라오스 최남단 지역에서 만난 이들로 부터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구상하게 됐다. 마지막 여행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셈이다.

2002년 부터 지인이 식당을 함께 했으면해서 식당업에 뛰어들었다. 식당업을 하게 되면서 그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된다. 그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인맥을 쌓아온 홍 협력관은 암암리에 라오스와 대한민국의 민간외교에서 막대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 곳 식당에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다녀갔다고 한다. 이같은 홍 협력관의 활동은 라오스 농촌지역을 발전시키는데 밑거름이 됐다.

더구나 홍 협력관의 '파워'도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대학교 아라해외봉사단의 의료봉사도 홍 협력관의 도움없이는 힘들었다는 후문이다. 라오스 정부차원에서 정식으로 의료봉사활동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3년과 올해 두 차례의 의료봉사가 가능하게 힘(?)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다른 지역에서도 앞다퉈 시도했으나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고 홍 협력관은 전했다.

홍 협력관과 학사이 마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2002년 사업을 할 당시 지인이었던 라오스 현지인의 조카가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아이의 집이 학사이마을이었다. 그때 아이가 다니고 있던 초등학교도 현재 학사이마을의 학교로, 폐교직전이었다. 때마침 제주 출신(의귀리) 김호경 세무사와 함께 학사이마을 학교를 새로이 건축하게 됐다. 그때가 2006년이었다. 홍 협력관 등은 학교측에 교재구입과 함께 전교생에 저금통장도 만들어주면서 저축왕도 뽑았다는 얘기를 소개했다. 김호경 세무사는 지금도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홍 협력관과 새마을운동의 연관 역시 우연찮게 찾아왔다. 2009년 당시 대한민국측에서는 미얀마를 대상으로 새마을교육을 계획하고 모든 일정을 확정짓고 추진 중이었다. 그러나 불과 교육 닷새를 남겨놓고 교육이 무산되게 됐다. 미얀마측에서 일방적으로 교육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다급해진 우리측에서는 미야마를 대신할 수 있는 라오스를 선택했다. 그 연결고리는 홍 협력관이었다. 요즘같으면 5일 앞으로 다가온 새마을교육일정을 맞추는게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홍 협력관은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켰고, 무사히 라오스 새마을교육은 마치게 됐다. 홍 협력관의 능력이 빛을 발하면서 새마을운동은 그에게 제2의 직업이 됐다. 이후 매년 세차례에 걸쳐 교육생을 한국으로 보내고 있다.

홍 협력관은 라오스의 새마을운동에 대해 상세히 풀어놓았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도로포장이 있게 되면 마을주민들이 직접 참여케 해 새마을운동 정신 중 하나인 협동정신을 배양하는데 주력했다. 게다가 과거 우리나라는 물론 제주도 역시 어려웠던 60, 70년대를 떠올리며 함께 노력한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을 이었다. "예전 제주를 떠올리면 지금의 라오스와 별반 다를게 없었지, 우리나라도 국제사회로부터 원조받던 시절이었으니까…"라며 말끝을 흐린 그는 "살아온 삶의 1/3가량을 이곳 라오스에서 보내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새마을운동이 라오스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적극 도울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라오스 국민들에게 더욱 효과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선 물질적 원조 못지않게 국민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교육프로그램도 병행돼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올해로 대한민국이 라오스와 국교를 회복한지 20년이 됐다. 국교회복 당시 라오스에 정착하기 시작한 홍 협력관은 재수교 20년이라는 역사와 함께 '새마을'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열어나가고 있다.

[홍정오 협력관은 누구]라오스 농촌개발 이바지

홍정오 협력관은 1947년 제주시 출신으로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제주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으로 떠났다.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둔 후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수출입 등 무역업은 물론 부동산업과 서귀포시에서 양어장도 운영했었다. 현재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과 라오스가 재수교 당시부터 다져온 인맥 등으로 민간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면 제주는 물론 한국내 지역별 새마을회와 협력을 통해 라오스의 농촌개발에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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