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 칼럼] 인문학에 길을 묻다[2]

[고경실 칼럼] 인문학에 길을 묻다[2]
②역사 속에서 지혜를 배우자
  • 입력 : 2015. 06.02(화) 10:22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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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시련과 한시도 떨어져본 시기가 없었다. 외세로부터의 침입과 같은 외부의 환경에 의한 시련도 끝이 없었지만 내부로부터의 분열과 분쟁의 시간들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북한의 도발과 사건들은 우리에게 아직도 외부 환경에 의한 시련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해주며 내부로부터의 분열과 분쟁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동북아 질서 속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사의 소용돌이와 미국· 일본· 러시아 등 강국들 사이에 끼어 한마디로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모질게 견뎌왔으며 버텨 가고 있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분열과 분쟁의 시간을 보낸 한반도의 역사

 최근 신문을 펴보면 미국과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고민을 말하는 글이 자주 등장한다. 남북문제, 북한의 핵 문제, '사드'의 도입문제 등 당장의 북한에 관련된 문제에서부터 주변국과 얽혀있지 않은 것이 없다.

대한민국 동쪽 끝 독도.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이웃나라 일본은 어떠한가? 36년의 지배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금씩 역사 왜곡의 길에 나서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 또한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이를 쟁점화시키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려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중국은 어떠한가? '고구려'를 중국역사의 한 축으로 만들려 하는 동북공정 조짐도 보인다. 이러하듯 동북아의 질서 속에 우리는 국제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혼돈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념으로 갈린 남과 북은 통일에 대한 발걸음보다는 여전히 적대적으로 갈등만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남과 북이 하나 되어 단합된 국력을 통해 복잡한 동북아의 질서 속에서 우리만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해방 이후 강대국들이 갈라놓은 분단문제조차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백가쟁명의 처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국내사정은 어떠한가? 여 와 야로 갈린 논리의 다툼은 끝없이 이어지고 이를 보고 있자면 민주주의 기초질서가 있는 것인지 과연 성숙한 민주국가의 품격은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동북아허브 실현 과정에서 계속되는 제주공동체 분열

 무대를 우리 제주지역 공동체로 옮겨보자, 우리는 관광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산업과 1차 산업의 생산이 경제의 중심에 있다. 관광산업은 자연경관 가치를 중심으로 수동적인 생산성을 유지해왔고 1차 산업은 대대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왔지만 아직도 자력 구조조정 능력이나 혁신보다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국제자유도시' 플랜을 중심으로 동북아허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라는 제도의 틀을 도입하였으나 이런 과정 하나하나에도 늘 통합보다는 분열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공존했다. 능동적 관광 상품 개발과 투자유치의 돛을 올리는 시점에는 자연가치의 손상이라는 바람이 공존하기 마련이었다.

 더불어 여러 측면에서 중국의 제주에 대한 폭발적인 영향력 증가는 제주의 정체성을 잠식시키는 잠재요인이 될 수 있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다양한 내·외재적 요인들은 우리 제주 사회로 하여금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미래가치를 구체화 하게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으며 앞서 말한 상황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우리의 현 시점은 국가의 위치에서 보거나 지역 단위로 볼 때 조선중기 동북아혼 돈의 질서와 유사한 시기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되돌아보자

 그래서 필자는 우리의 조선중기 역사 중 두 가지 상처를 돌이켜보려 한다.

 조선중기에 있었던 '임진왜란(1592~1598년 선조)'과 '병자호란(1636~1637년 인조)'이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동북아 질서의 재편시기에 우리의 적절한 대응에는 정치권의 무지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과 두 사건 모두 선비들이 명분과 실리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튼튼한 국력을 키우는 일이나 실용주의 실사구시 정신보다는 논리싸움과 눈앞에 욕심에 눈이 멀어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세력이 커지는 시점에서 황윤길(서인)과 김성일(동인)이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견과 '아니다.'라는 의견의 엇갈린 주장에 대해 정치권에서 국가공동체 보다는 자신들의 집단 이익에 안주하며 빚어진 아픈 역사의 결과물이다.

 병자호란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벌어지는 힘의 균형을 관찰해내지 못하고 벌어진 아픔의 역사이다. 여기도 국가공동체 보다는 최명길을 중심으로 화전파와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의 당파 갈등과 명분만이 존재했다. 그들의 명분과 논리싸움 끝에는 힘없는 백성들이 노예로 끌려가 피눈물 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결과만이 있을 뿐이었다.

 조선중기에 있었던 두 '란'은 한반도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의 삶을 병들게 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으면 이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문명을 간파해야 했을 법도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다시 나라를 잃고 치욕의 36년을 보냈다. 또한 지금도 그 잔재로 인해 국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도자의 무능으로 백성들은 역경의 삶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던 지혜로움이 부족했던 지도층의 무능으로 그렇게 수없이 많은 이 땅의 백성들은 역경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시련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이라도 역사의 아픔을 교훈 삼아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과 그 동향에 대해 우리는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지혜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 거대한 기관차의 질주 속에 한가로이 거니는 아이들과 같은 상황은 아닌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해야 한다.

한라산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일출.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판단이며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한 진단을 철저하게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강력한 문화적 정체성과 더불어 자력 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 우리 스스로로 하여금 국가적 정체성과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임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우리의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 해법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명분과 논리싸움이 아닌 실사구시 정신으로 지난 역사와 비추어 지금의 우리의 삶을 성찰하는 지혜가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 추구가 열쇠

 인문학의 중요성은 여기에도 있다. 우리 존재의 의의와 미래의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열쇠를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최선의 정의는 우리를 함축하고 있는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정의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후손들의 삶을 지키고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려 붉은 피를 흩뿌렸던 호국영령에 대한 숙연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아 보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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