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실칼럼] 제주는 격조있는 도시일까?

[고경실칼럼] 제주는 격조있는 도시일까?
인문학에 길을 묻다<13>
  • 입력 : 2015. 10.23(금) 08:37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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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가을저녁 어느 농촌마을 석양노을이 대청마루를 붉게 물들어가는 무렵 하얀 모시적삼으로 곱게 단장한 할머니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다. 4칸 초가집이지만 잘 정돈되어있고 마당에는 가을 코스모스가 담벼락에 붙어서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하늘거린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서려있는 느낌이 몰려온다. 동네에 밥 짓는 고소함이, 사람 사는 향기가 고스란히 온몸으로 다가온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나그네의 고적함을 맛보게 해주는 순간이 된다. 할머니는 무슨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것일까. 마실 나간 할아버지 생각……. 아니면 육지로 나가 살고 있는 아들, 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을 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했든 흐트러지지 않는 격조가 느껴지는 모습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옛날 선비들이 지녔던 기상이 바로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간결한 기품 속에서 격조를 품었던 그런 모습이었을 듯싶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선비'들의 삶이 그리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삶에 한 가닥 기강이 흘렀던 문화는 본받을만한 정신적 유산이 아닌가 싶다.

 제사 지내고 집집마다 떡을 나누던 인심

 최근에 사회 도처에서의 자신의 삶을 위해서는 인간적인 품위마저도 망각해버리는 세태에서 회고하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잠시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고향에 모습도 시간이 흐르면서 한적하고 향기 나는 그런 공간은 차츰 흔적을 감추고 있다. 여기저기서 현대식 건물들이 성냥갑처럼 촘촘하게 들어서고 있고 초가집은 고사하고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너도나도 지었던 슬래브 집들도 하나둘 사라저가고 있는 중이다.

 제사를 지내고나면 골목 집집마다 떡을 나누었던 인심도 함께 꼬리를 감추고 도시에서 번지고 있는 경쟁과 개인주의가 점점 시골의 한적함이나 구수한 인심의 자리를 차지해나가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도시는 어떠한가. 차를 몰고 가는 운전기사가 담배꽁초를 창문너머에 던지고, 가래를 뱉고, 방뇨를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차량통행을 위해 많은 예산을 들여 만들어놓은 도로는 통행보다는 주차가 우선시 되어버렸다. 그래서 도로의 절반은 주차공간으로 뒤바꿔가고 있는데도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0대 청소년들이 노인들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대하는 모습들이나, 사람을 죽여 시체를 유기하는 사건, 재산이 먼저인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형제간이야 또 어떠한가. 삼강이니 오륜이니 하는 말들은 구시대 노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 만능주의의 폐단이 점점 심각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들 한탄하기도 한다.

 절반은 주차장으로 변해가도 당연시되는 현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쓰레기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잠식시키고 부패하고 썩은 냄새만을 사회에 쏟아내지만 이런 일들을 모두 남이 탓으로 치부할 뿐이다.

 유명 방송 프로그램이나 여의도 불꽃축제와 같은 대형 행사의 화려한 면모 뒤에 남는 쓰레기와 무질서 등의 어두운 면모는 우리에게 인간,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다.

 'who am I' 즉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나는 사람이다.'이며 이는 다시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인가?'로 그 질문의 꼬리를 문다. 이에 대해 '사람은 생각할 줄 아는 갈대다.'라고 했다. 또한 '양심이 있는 동물이다.'라고도 했다. 이는 사람이 이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천(天) 지(地)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수많은 생명체 중 왜 사람이 특별한 것인가. 중용에서는 하늘의 명을 담은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인의예지를 실천하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불심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각할 수 있기에 위대한 것이 사람이라 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빛을 받을 수 있는 의식의 빛이 존재하기에 그러하다고 했다.

 이러한 모든 현자들이 찾아낸 사람의 위대성은 결국 이타심을 실현함으로서 실체화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주지 않았나 싶다. 그럼 결국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의편이와 이익에 앞서 모두를 바라보고 배려와 나눔을 통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길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되면 지구촌의 온난화 문제, 평화의 문제, 질서의 문제들이 나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옛 선조들이 가난했지만 인간으로서 기품 있는 질서를 지키려했던 그 모습이 고향의 언저리에 향수로만 남아서는 안 될 듯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는 국제휴양 관광지로써 세계 사회에 파장을 주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지구촌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주시하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가 지구촌에 격조 있는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우리의 생활 속에 담아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를 찾아온 손님을 배려해야하고 늘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에 청결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질서 있는 공간이 조성되고 손님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고요함도 우리의 정성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 다정다감한 친절에서부터 검소한 일상, 지구촌을 걱정하는 에너지활용,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깃들여 있어야 한다. 탐라천년이 혼을 담은 그런 소담스러운 공동체를 품은도시 그 도시가 격조 있는 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탐라천년의 혼이 깃든 공동체를 품은 도시로

 우리는 사람다운 이타심을 갖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며 우리 후손들이 그 뒤를 이어나갈 것이기에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이 도시에 심안'을 찾았을 때 격조 있는 도시로의 지속 가능성을 찾을 것이다.

 깊어져가는 가을이다. 너나 잘하라는 비아냥거림보다는 함께 잘해보자는 미덕으로 미래의 역사가 될 현시대를 함께 살아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 오늘에 사색을 담아내 본다.

 연약한 할머니와 어머니 기품에서 안개가 어려 있는 한라산의 품안에서 우리는 삶을 일궈왔다. 서로 협동하면서 어려웠던 시절도 이겨내 왔다. 그런 지혜가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왔고 문화로 만들어지며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는 그래서 지나버린 과거가 아니고 현재에 녹아 흐르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흐트러지고 무질서하며 혼자만을 생각하는 삶의 무더기가 된다면 그런 격조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늘어나는 도심 속의 차량들을 보면서 이것저것을 함께 담아 생각해보는 순간이다. 제주 사회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격조 있는 도시의 품격에 대한 사색을 같이 공유했으면 해서이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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