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人터뷰]고길홍 사진가 ‘서예가 소암 사진 기증’

[한라人터뷰]고길홍 사진가 ‘서예가 소암 사진 기증’
"먹물 없어질 때까지 글 쓰시던 모습 생생"
  • 입력 : 2017. 05.24(수)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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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 현중화 선생의 작업 모습과 일상을 20여년간 카메라에 담아온 고길홍 사진가가 소암 사진 기증전에 전시될 작품을 보고 있다. 강희만기자

1970년대부터 소암 작업실·소묵회 지도 현장 등 촬영
오는 27일부터 기증전… 개인을 넘어 제주예술사 기록

서귀소옹(西歸素翁)이란 말년의 자호처럼,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서예가가 방바닥에서 몸을 떼고 앉은 채 글씨를 써내려가는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여든이 넘은 나이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소암 현중화(1907~1997) 선생이다.

10년전, '소암 탄생 100주년' 연재물을 준비하며 도움을 구했던 사람 중 한 명이 고길홍 사진가였다. 서예가가 아니라 사진작가를 통해 소암을 만나려 했던 건 그가 누구보다 가깝게 선생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창작산실인 '조범산방'에서 글을 쓰거나 연초를 태우며 환하게 웃는 장면 등 우리가 봤던 소암의 사진은 열에아홉 그의 손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처음에 소암은 자신을 향한 카메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소 경직된 표정의 소암 사진은 이 시기에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소암이 작고할 때까지 20여년이란 긴 시간은 두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어느날, 조범산방에 석양이 비쳐드는데 선생님께서 갈아놓은 먹물이 없어질 정도로 글쓰기에 몰두하셨다. 나 역시 준비해간 필름을 다 써버릴 만큼 무아지경에 빠져 선생님의 모습을 담았던 일이 있다."

고 작가에게 소암은 한라산과 더불어 고집스럽게 작업해온 주제다. 소암을 "늘 공부하는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그는 직장일이 없는 주말마다 조범산방으로 향했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소암의 서예 작품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보다 더 자주 소암을 접했다. 소암이 병석에 누웠을 때 '고 선생'을 찾은 건 그런 이유다.

소암과의 인연을 필름카메라에 차곡차곡 쌓아온 고 작가. 그가 그동안 촬영해온 소암 사진을 서귀포시 소암기념관에 조건없이 기증하기로 했다. 소암기념관 등에서 그의 사진을 활용할 때마다 도움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번엔 원판 사진까지 선뜻 내놓았다.

지난 22일 만난 그는 "때가 되면 소암기념관에 갈 사진으로 생각했다"며 "관람객들이 소암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소암기념관은 기증에 맞춰 이달 27일부터 7월 2일까지 고길홍 사진가의 소암 사진전을 연다. 광주·마산 등에서 소묵회를 지도하는 장면 등 개인에 대한 기록을 넘어 제주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풍경들이 나온다. 제주의 예술가를 기록했던 또다른 예술가의 열정과 집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은 "선친이 작고한지 2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늘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당신의 삶과 심연 속 인상을 담아낸 고길홍 형님의 심안(心眼)의 사진들 덕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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