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제주마을 탐방] (4)제주다운 정취 간직한 상귀리

[조미영의 제주마을 탐방] (4)제주다운 정취 간직한 상귀리
'애조로' 개통 후 변화 조짐… 제주 정취는 고스란히
  • 입력 : 2018. 05.22(화) 0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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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게스트하우스 등 '부쩍'… 예의주시
삼별초군·여몽연합군 전투로 마을피해 짐작
조선시대 불상 봉안 월령사 등 사찰 '눈요기'







길게 뻗은 애조로 길을 시원스레 달리다보면 서부경찰서 가기 전 사거리에서 상귀리 표석을 만나게 된다. 귀일현의 일부였다가 1608년 하귀리와 상귀리로 분리되고, 다시 1884년(고종21년)에는 상귀리에서 고성리가 나눠진다. 이후 상귀리는 신산동, 소앵동, 광석동, 동동, 부처물동과 같은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된다. 그러나 지금은 부처물동에 사람이 살지 않아 4개동만 남아있다.

설촌유래는 약 78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고려시대의 기와와 토기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238년(고려 고종 25년) 고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됐으나 1271년(고려 원종 12년) 삼별초군에 의해 마을이 소개됐다고 한다. 나중에 강씨, 김씨, 문씨 등 사람들이 이주해 오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북쪽으로 하귀리와 인접하고 남쪽으로 고성리와 유수암리의 경계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광령3리의 버령천과 파군봉을 끼고 있다. 과거에는 해안과 산간의 중간이라는 애매한 위치가 여러모로 불편했었다.

#일주도로를 이용해 하귀리를 거쳐 오거나 중산간도로에서 고성리를 지나와야만 하는 불편한 교통과 산과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경관이 주는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부흥기는 없었다. 그저 도란도란 조용히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기고 있다. 마을과 인접해 애조로가 개통되며 교통이 편리해진 반면 마을은 큰 변화가 없이 제주다운 정취를 간직하고 있기에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발의 흔적이 없는 마을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것은 비단 나만의 욕심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요즘 부쩍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원을 낀 예쁜 게스트하우스 등이 마을 어귀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런 변화들이 마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조금 두고 볼 일이다.

마을에는 망모를 동산이라는 곳이 있다. 현재 항몽유적지 북쪽으로 삼별초 방어군이 망을 보던 자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소문이라는 지명은 항파두리성 남쪽에 위치한 옛 남소문터를 일컫는 말이다. 이 같은 지명유래에서 보듯 삼별초가 상귀리에 끼친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상귀리의 시초인 속칭 내비담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삼별초군에 의해 퇴각당해 북쪽으로 이주해 생긴 마을이 신산동이다. 그러고 보면 외부의 침입에 의한 피해는 몽골군뿐만 아니라 삼별초군에 의해서도 당한 셈이다.

상귀리의 남쪽 끝자락에서 고성리에 걸쳐 항파두리성이 있다.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던 삼별초군이 쌓았던 토성이다. 1274년 성이 함락된 후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1976년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귀리 마을 곳곳에 그들이 남긴 유적들이 있다. 삼별초군과 여몽연합군과의 전투 과정에서 이 마을사람들이 당했을 피해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마을을 관통해 좌우로 소왕천과 고성천이 흐른다. 예부터 이렇게 물이 좋은 마을이라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듯하다. 소왕물, 구시물, 장수물, 옹성물 등의 용천수가 있다. 극락사 내에 있는 옹성물은 성곽 옆에 샘물이 솟아나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김통정 장군을 위시한 군의 지도부들이 주로 먹던 물이다. 이후에도 이 물을 신성시해 집에 정성을 들일 때 사용했다고 한다. 구시물은 수로를 파서 토성밖에 나무로 성을 쌓아 만든 식수터로 삼별초 군과 마을사람들이 먹었던 물이다. 물의 수량이 풍부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전염병이 돌때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상귀리 북쪽 끝 파군봉자락을 끼고 월령사가 자리한다. 태고종 사찰로 부처물동의 전설이 흐르는 곳이다. "어느 날 사찰이 갑자기 무너지고 스님이 쓰던 대야가 묻혔는데 비가 와서 물이 넘치면 대야우는 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렸다"해 붙여진 이름이 부처물이다. 지금은 물이 말라 예전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 곳에 사찰이 생긴 지는 꽤 오래전이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17~18세기에 월령사가 있다가 폐사한 후 다시 재건한 것은 1930년대이다. 그러나 4·3 당시에 전소되는 피해를 입고 1962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창건했다. 경내에는 인상적인 건물이 있다. 돌집을 단장해 만든 법당이다. 내부에는 조선시대 불상인 목조여래좌상이 봉안돼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좌측 바닥에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청동여래좌상도 함께 모셔져 있다.

남쪽의 항파두리성 초입에는 극락사가 자리한다. 1944년 창건된 사찰이다. 이 곳 역시 1948년 10월 4·3의 와중에 전소됐다가 1957년 지금의 위치에 이전해 왔다. 아담한 사찰 경내에는 분홍등불이 만개했다. 마치 연꽃이 하늘에 떠있는 착각을 하게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기원을 담은 마음들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같이 담겨있길 바란다.

상귀리 마을의 소박함에서 나눔과 공존의 소중함을 느끼며 발길을 돌린다.

<여행작가>







[인터뷰] 강종석 상귀리장


"발전 가능성 크다… 항공기 소음은 숙제"


상귀리는 고려시대 때부터 설촌 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하지만 위치적 특성상 큰 변화 없이 지금껏 이어져왔다. 마을구성원 대부분이 이 곳에 뿌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최근에 변화의 바람을 타고 이주민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350여 가구에 약 천여명이 거주한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은 밭농사를 짓는다. 쪽파, 얼갈이 배추, 시금치 등이 주요작물이다. 그 밖에 과수원 등을 운영한다. 이주민들이 들어와 게스트하우스 등을 조성했는데 아직은 마을사람들과의 소통이 없다. 마을 체육대회나 행사에 같이 참여하며 친분을 쌓고 협동하여 지냈으면 한다.

상귀리에는 본향당이 있다. 항다리궤라는 곳인데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이렛날이 되면 마을에서 큰 굿을 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중단됐다가 최근에 다시 마을제 형식을 빌어 하고 있다.

애조로가 개통돼 시내까지의 접근성이 좋아졌다. 인근에 서부경찰서가 들어선 것도 마을차원에서는 긍정적이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본다. 하지만 항공기 소음은 큰 문제이다. 마을 내에서도 소음 피해 지원을 받는 곳과 못 받는 곳이 공존한다.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좀 더 세심한 노력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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