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0주년/ '요망진 제주사람'을 만난다] (1)임찬기 민주당 전략기획국장

[창간30주년/ '요망진 제주사람'을 만난다] (1)임찬기 민주당 전략기획국장
"용광로 근무 보람… 고민하는 정당인 될 것"
  • 입력 : 2019. 04.22(월) 00:00
  • 부미현 기자 bu8385@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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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주저 않고 새 인생 도전… 제주인 저력 알린다
한라일보 창간 30주년을 맞아 '요망진('야무지다'의 제주어 표현)' 제주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제주인의 저력과 가능성을 찾아보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며 살아온 이들을 소개한다. 패기와 도전정신을 잃지 않는 제주인처럼 한라일보도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제강 엔지니어로 일하다
2003년 정치권에 '첫발'
당 핵심 보직 두루 거쳐

정당의 조직·총무·홍보 부문의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정당 당직자는 '정당의 꽃'으로 불린다. 정당에서 오래 근무한 당직자는 여느 정치 신인 보다도 정치 현안에 밝고 정보도 능통하다는 평을 받는 직군이기도 하다.

제주출신 임찬기 더불어민주당 전략기획국장(51·사진)은 민주당을 지원하는 중앙당의 핵심 보직을 두루 거친 최고참 당직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며 당직자로 출발, 민주당 대표실 부서장, 당 조직국장, 원내기획국장, 민주연구원 운영지원 실장 등을 역임했다. 당의 전략 기조와 정국 현안에 대한 대응 방안을 수립하고, 당의 선거의 기준이 되는 공천기준, 각종 당의 여론조사 실시, 당 대표의 정국 현안에 대한 지시에 따른 즉각적 대응 방안 마련 등의 업무를 수행해왔다.

당직자로서 주요 보직을 섭렵하며 이제는 최고참이 된 그에게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남다른 이력이 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철을 녹여 철강제품을 생산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점이다.

임 국장은 제주시 삼도동에서 출생해 중앙초, 제주제일중, 대기고를 거쳐 인하대학교 금속공학과를 나왔다. 대학 재학 중 영화동아리 활동을 해서 영화 방면 진로를 고민하다 4학년 때 취업을 방송사 쪽으로 도전했는데 실패했다. 그 뒤 구인 공고를 보고 얻은 첫 직장이 당시 재계 14위였던 모 철강회사였다. 그는 용광로에서 고철을 녹여서 새로운 철을 만드는 공정을 관리하는 제강 엔지니어로 일했다.

"1700도짜리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일이라 무척 덥고 위험했습니다. 이직율도 높았는데 저는 버려지는 고철을 새로운 제품으로 만드는 일이 재밌었고,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불량을 없앨 수 있을까 연구하고 싶어 대학원까지 진학했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1997년 IMF 위기 때 부도가 났다. 당시 직원 5000명 중 3000명이 퇴출된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그 역시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곧 동종 업계 중소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행운이었고, 동시에 시련이기도 했다.

"그 때가 정말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대기업에 다니다 중소기업으로 이직했을 때 임금과 처우 등에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더욱 일을 열심히 하면서 극복했습니다.당시 직장이 있던 경기도 화성에서 인하대 대학원까지 일주일에 세번씩 퇴근 후 수업을 듣고 주말에는 실험하고, 공학석사 논문을 썼어요. 지금도 어려울 때는 그 때 생각을 하면서 버팁니다."

그가 회사일에 정열을 쏟던 어느 해 그는 우연히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알게 됐다. 평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집과 직장만을 오가던 그였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 과정에서 노사모을 알게 되고 모임에 가입, 경선 과정에서 자원 봉사에 참여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2002년 8월 8일 보궐선거 참패가 가져온 당시 대선 후보(노무현) 교체 움직임(이른바 후단협 사태)이었다. 그때 그는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가만히 있으면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아내에게 3개월만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회사를 그만 뒀습니다. 노무현 후보 서울 여의도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됐는데 소액 후원금을 받는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국에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선은 승리했지만 자원봉사자였던 그에게 처음에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게 됐고 당직자로서 정치권에 발을 딛게 됐다. 공대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주로 인터넷 관련 업무를 맡았는데 이후 주요 보직을 맡는 당직자로 자리 매김했다.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일이 주어지면 기본은 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핵심을 파악하고 그걸 논의하는 틀거리를 만드는 걸 고민해왔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정당인으로서 오래 버티는 것은 사익과 공익이 거의 일치해서입니다. 당이 추구하는 것과 제가 추구하는 이상이 비슷하기 때문이죠"

당직자로서 거칠 수 있는 주요 보직을 두루 섭렵하다보니 그에게는 정무직이나 선출직으로의 행보를 궁금해하는 눈길도 있다.

"저는 항상 고민하는 정당인으로 남고 싶습니다. 소속 정당이 정권을 잡지 못할 때는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는 계속 성찰해야 합니다. 지금은 당 내에서 당직자중 최고참이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치적 목적을 떠나 제주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소망도 갖고 있습니다. 제주도당에서 사무처장을 2년 반동안 하면서 그 꿈이 구체화됐지요. 육지에 있던 사람이 제주도 가서 정치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웃음). 제주에서 협동조합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함께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

그는 제주 출신은 소수이지만, 그래서 주목받는 것이 장점이라며 후배들에게 '임제록'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자세를 당부했다.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라. 네가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자리'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하는데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진실되게 하면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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