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6)천자와 황제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6)천자와 황제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을 따르는 것이 곧 하늘”
  • 입력 : 2019. 07.18(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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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이름 못쓰게 한 진시황
삼황오제 능가한 자부심의 발로
요순 정권 이양 혈통 아닌 인품


진秦의 군왕인 영정영政은 한韓, 조趙, 위魏, 초楚, 연燕, 제齊 여섯 제후국을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서기 221년 천하를 통일했다. 주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지만, 그는 그렇게 부르기를 원치 않았다. 대신 황제皇帝라 호칭토록 하고 천자를 자칭하는 '여일인予一人' 대신 짐朕('나'의 뜻)이라 불렀으며, 황제의 명령은 '제制'와 '조詔'로 칭하도록 했다. 아울러 황제만 사용하는 옥새玉璽를 만들고, 황제의 이름은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역대 제왕이나 성현, 가장의 이름 등을 후대 사람들이 직접 말하거나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당대 시인 두보杜甫는 부친의 성명이 두한杜閑이었는데, '두공부집杜工部集'에 수록되어 있는 전체 1500여 수의 시가 가운데 '한閑'이란 글자가 전혀 없다. 피휘는 진나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황제가 직접 나서서 공식적으로 금지시킨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진나라 장성유적.

황제라는 이름은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따온 것이다. 이전 주나라는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 아래 제후국의 임금을 군君 또는 왕王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천자라는 말을 버리고 '황제'라는 호칭을 택했을까? 첫째, 자신이 한족의 성인이자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삼황오제를 능가하는 인물이라는 자부심의 발로이다. 둘째, 천자는 하늘의 적장자嫡長子이다.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제왕들은 하늘에서 명을 부여받은 이들의 직계이다. 하지만 중원에서 서북쪽으로 비껴난 외진 곳, 지금의 섬서성에 자리한 진은 효공孝公이 상앙商앙을 통해 변법變法을 실시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기 전까지 왜소한 제후국이었다. 제후국의 왕이 어찌 천자가 될 수 있겠는가? 셋째, '사기'에 따르면, 진의 선조는 고요고陶와 백예伯예(백익伯益, 대비大費)라고 한다. 하지만 고요는 후대에 성인의 반열에 들었으나 신하일 뿐 천자가 아니었고, 대비는 전욱전頊(황제의 손자)의 후예라고 하나 순임금이 영성영姓을 하사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확인되지 않은 전설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천자의 자격이 온전치 않다는 뜻이다.

진시황의 화상.

사실 중국 역대 개국군주들은 하늘의 자식(天子)이기는커녕 듣도 보도 못한 집안의 자식인 경우가 허다했다. 오제 가운데 한 명인 우순虞舜은 장님의 아들이며, 그의 아비는 도덕이 뭔지도 모르는 막돼먹은 사람이며 어미는 남을 헐뜯기나 하는 이였다. 그런 집안의 자식이 어떻게 하늘의 자식이 될 수 있을까? 한나라의 개국황제인 유방劉邦은 또 어떤가? 요순부터 시작하여 하은주 삼대와 진대의 군주는 모두 황제의 자손이라고 치자. 그들이 군주가 된 것 또한 나름 명실상부하고 덕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자. 하지만 유방은 평민 출신인데다 부친의 이름조차 알 수 없으니 집안의 족보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가 귀족 출신의 항우項羽와 싸워 이겨 단숨에 정권을 차지하고 천자가 되었지? 사마천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후 한나라의 유자들은 유방의 천자 자격을 확보하기 위해 오랜 세월 공을 들였고, 마침내 요 임금의 후손 가운데 유루劉累라는 이를 찾아냈다. 이리하여 유방은 요 임금과 연결되고, 더 올라가 황제와 이어져 천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다면 이민족 출신의 개국황제들은 어떻게 되는가? 칭기즈칸의 손자로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나 애신각라愛新覺羅 성姓을 가진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는 삼황오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데 어떻게 천자가 되고, 황제가 되었을까?

요(堯), 순(舜), 우(禹) 임금(왼쪽부터).

천자가 천자일 수 있는 까닭은 천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명을 부여받았음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오제 가운데 한 명인 요堯 임금은 순에게 천자의 정치를 건네주기로 마음먹고,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천명에 부합하는 것인지 관찰하게 했다. 이에 순은 하늘을 관찰하여 역법을 고치고, 사방을 순수巡狩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제후들을 접견했으며, 전국을 12주州로 나누고, 형벌을 신중하고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사방의 이민족을 교화시키니 천하가 모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요 임금은 자신의 불초한 아들 단주丹朱 대신 순에게 천자의 자리를 넘겨주니, 순은 "천명이다(天也)"라고 생각하며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아름다운 선양禪讓의 시작이다. 사마천은 '사기·오제본기'에서 요와 순의 정권 이양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핵심은 순 임금이 효순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부모와 동생까지 품에 안았고, 천하 만백성이 그에게 귀의할 정도로 덕정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말인 즉 혈통이 아니라 인품이며, 천명이 아니라 인명人命이란 뜻이다.



"밥 대신 고기국 먹으면 되잖냐"
자연재해 앞에 사마충의 발언
진승 "왕후장상 씨 따로 있나"


주나라 무왕 희발姬發은 이미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늘은 백성을 어여삐 여겨 백성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따른다. 너희들은 나를 보좌하여 천하의 죄악을 영원히 없애야 한다. 결코 시기를 놓치지 말라!"('상서·태서泰誓')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을 따르는 것이 곧 하늘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혜제(惠帝) 사마충.

맹자는 이를 통해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탕湯이 걸桀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고,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내고 천자가 되었는데 과연 이것이 사실입니까?" "전해 오는 기록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맹자가 답하자 왕이 다시 물었다. "신하 된 자가 자신의 군주를 시해弑害한 것이 도리에 맞는 일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인의를 해치는 잔적殘賊을 일부一夫(일개 필부)라고 하니 무왕께서 일개 필부인 주紂를 주살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맹자·양혜왕')

이러니 "아, 내가 태어나 군왕이 된 것은 천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사기·은본기')라는 은나라 마지막 군주 주紂의 말이 참으로 허망하고, 반대로 "인정사정없는 하늘은 은을 멸망시켰다. 은은 천명을 상실했고, 우리의 주가 이것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토대가 항상 번영할 것인지는 감히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상서·군석君奭')는 주공周公의 말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최초의 농민반란군 우두머리 진승(陳勝).

역성혁명이든 무엇이든 간에 천명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개국황제의 이념과 의지가 왕조 내내 초지일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무엇보다 역대 황제의 인품과 능력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조의 권신이었던 사마씨 집안의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曹奐의 선양을 받아 개국한 것이 진晉나라이다. 무제 사마염이 죽자 그의 아들 사마충司馬衷(혜제惠帝)이 등극했다. 어느 해 자연재해가 심각하여 백성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이가 속출했다. 신하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하자 그가 대답했다. "(밥이 없다면) 왜 고기국을 먹지 않느냐?"('진서晉書·제기帝紀') 명청 교체기의 저명한 사상가인 왕부지王夫之가 말했다. "혜제의 우매함은 고금을 막론하고 견줄 자가 없으니 나라가 그로 인해 망했다."

청대옹정제.

"하늘을 종으로 삼고, 덕을 근본으로 삼는다(以天爲宗, 以德爲本)."('장자·천하')는 말은 황제가 반드시 지켜야할 도리이자 원칙이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인가?"라는 진승陳勝의 말이 새삼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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