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김효선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

[이 책] 김효선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
‘이녁'이라는 환한 등으로 견디는 힘
  • 입력 : 2020. 05.15(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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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을 펴낸 김효선 시인.

사랑이라는 지독한 방부제
수만년 된 하논까지 이르며
상실감 넘어 '다시 살아보자'

기다려도 그 사람은 올 기미가 없다. '너무 오래 사랑한 죄' 였을까. 김효선 시인의 신작 시집엔 그같은 슬픔의 나날을 넘기는 시적 화자가 등장하고 고통을 견디는 힘이 가까운 곳에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 '어느 악기의 고백'은 '하논의 시간'처럼 멀게는 5만년 전까지 다다른다. 태곳적 생태계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오늘날까지 흔적을 남기는 법, 우리의 생애도 그렇듯 과거의 아픔이 오래도록 남아 현재를 흔든다. 제주에서 나오는 계간문예 '다층'에 산문 '시로 떠나는 제주풍경'을 연재하며 고향 구석구석을 누볐을 시인은 제주라는 공간에서 다시 살아보자고 한다.

'절벽에 핀 나리꽃은 얼마나 아찔한 목소리인지// 휘파람에 허밍이 얹혀 오는 아침/ 너무 오래 미워하면 너무 오래 사랑하게 된다/ 깨지기 쉬운 심장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로 시작되는 '바다유리심장'으로 첫장이 열리는 시집엔 그리움의 정서가 밀려든다. '나는 언제나 먼저 가 기다리는 쪽'('기연(機緣)')이라는 화자는 '어제 사랑한 얼굴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요'('우표를 붙이겠습니까')라고 읊는다. 하지만 '사랑만큼 지독한 방부제가 있을까'('미투리')에 이르면 그것이 곧 거짓이라는 게 드러난다.

동자복과 서자복, 먼물깍, 우도, 애월, 하논, 서귀포 등 시인은 섬이 품은 이야기에서 앞선 상실감을 씻어낼 '이녁'이라는 '환한 등'을 본다. '이녁'은 '당신'이란 어휘로는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지닌 제주 방언이다.

시인은 오래오래 뒤척일 때면 하루에 70만 번 들썩이고 뒤집어지는 애월 바다로 향해 더운 가슴 식히고, 죽어야 끝나는 관계를 떠올릴 때면 수만년 살아온 하논에 가서 스스럼없이 용서한다. 마침내 시인은 '다시, 서귀포'를 부른다. 서귀포는 '다시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위로만으로도// 가장 뜨겁게 오래 피는 마을'이라며 '다시 사는 생이 있다면 그런 생이 온다면/서귀포, 서귀포에 가서 살자'고 우릴 이끈다. 문학수첩.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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