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6)문전제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6)문전제
신화의 속뜻 '부엌과 변소는 서로 멀어야 한다'
  • 입력 : 2020. 06.29(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자연과 초자연 경계선 문지방
문전제 지내 출타시 안전 기원
다신(多神) 자율적 공존 사상


#마루의 대문 관장하는 일문전

제주도 제사(祭祀)에 문전제(門前祭)가 있는데, 문전제란 말 그대로 문(門)의 신(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때의 문은 마루 대문을 말하는 것이다. 조상제사 때는 물론 추석, 설 명절에도 맨 먼저 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여전히 제주도에서는 이 문전제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다. 왜 제주인들은 육지[本土]와는 달리 문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

추석 문전제.

조상제사상을 마루에 차리고 다시 작은 상 하나를 망자가 앉은 위치의 오른쪽에 따로 상을 놓는데 이것이 문전상이며, 본 제사를 지내기 전에 이 작은 상을 먼저 문 앞에 가져다 놓고 마당을 보면서 초헌관이 단독 단작으로 문전제를 지낸다. 이 문전제는 가장 중요한 제차이다. 문의 신의 이름은 '문전(門前)'으로 마루의 대문을 관장하는 신이다. 집안에 따라서 '일문전(一門前)'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제일 먼저 치르는 제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예전에는 그 상징으로 대문 위쪽 벽에 대나무에 옥양목을 접고 실타래와 함께 걸어 놓았다. 지금은 지붕 개량 후에 그 전통들이 사라졌지만, 실제로 지금도 필자의 집에는 이 문전신의 신체가 걸려있다. 필자의 부친이 30대에 이 문전의 신체를 떼어버렸다가 동티가 나서 한 달 동안 눈이 멀어 굿을 한 후에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고 다시 이 신체를 걸어놓아 오늘에 이른다.



#금기(taboo)를 위반하면 동티

문을 나서는 것은 낯선 곳으로 출타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문신(門神)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에 이르는 통로이며, 새로운 기회를 위해 열리는 시작이기도 하지만 저승과 같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입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에는 반드시 구조상 문지방(threshold)이 있으며, 상징적 의미로는 기준점이자 출발하는 입구에 해당하고, 마지막에는 어떤 정황의 한계점인 경계(liminality)를 말하는 것이다. 문지방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외부의 속된 공간에서 내부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이행하는 것, 곧 새로운 세계로 들어감을 상징하게 되며, 이는 자연과 초자연이 만나는 경계선이 된다. 전 세계적으로 그 문지방은 용, 뱀, 괴수, 개, 전갈 인간, 사자 등이 지키고 있으며, 이들을 먼저 쓰러뜨려야만 성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 경계에서 맘대로 나가지 못하도록 반드시 문지기 수호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J.쿠퍼(Cooper), 1996).

추석 문전제 올래 잡식.

문을 드나드는 것은 일종의 금기 행위가 된다. 금기를 위반할 시 동티가 나는데 이런 동티 사상은 공동체의 신성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금기를 지킴으로써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분명하게 나뉘며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면 그 위반에 따르는 처벌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제도가 바로 이런 금기적 행위가 진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위반 시 법적 처벌을 받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인간 세상의 일은 매우 다양하여 공사(公事), 이사(移徙). 제사, 장례. 혼인, 입신양명, 출행(出行, 출장이나 물 밖의 군대) 등에는 반드시 길일을 선택해야 하고, 그것과 관계된 금기를 지키기 위해서 신중해야 생명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과거 제주 사회가 얼마나 힘들었던 사회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바다. 금기가 많다는 것은 한 사회의 권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인들은 인간사의 험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것을 동티로 생각하여 위안을 얻고자 굿을 통해서 현실의 불안감과 공포를 극복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1907~1986)의 말대로 알타이 샤먼 의례에 지하 세계 일곱 개의 계단을 지나는 제차가 있는데 이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장애물을 '푸닥(pudak)'이라고 한다. 이 푸닥을 지날 때마다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들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푸닥을 지나야만 신의 궁전이 나온다. 그 궁전은 돌과 검은 흙으로 지어졌고 매우 경비가 삼엄한 곳이다. 이 샤먼은 지하 저승세계에서 이승으로 돌아와서 그 의례를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녀온 지하 세계 여행의 결과를 알려주게 된다. 이것은 마치 제주 굿의 '귀양풀이'에서 망자의 넋을 달래고 산 자들을 위령하는 제차인 질치기와 비슷하다. 한국의 '푸닥거리'가 나쁜 것, 악한 것을 제거하는 의례와 같이, 그 유례가 바로 알타이 무속의 푸닥(장애물)을 물리치는 것과 문화적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 굿 또한 넋들임, 새도림, 질치기 등이 이 푸닥거리의 일종인 것이다.



#문전본풀이의 역사적 반영

문전제는 무속의례에서 왔다. 원래 도가·무속·불교 사회를 이어오던 제주사회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신유학이 밀려왔고, 그들이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무자비한 탄압이 행해졌다. 무속 본풀이에 자주 등장하는 이형상은 '영천의 깡패'라는 과거의 담론이 그 증거이다. 그렇지만 여성 중심의 종교였던 굿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제주의 문화적 원류를 지탱할 수 있었다. 문전제가 유교와의 타협 속에서 공식적인 제사의 첫 제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제주 여성의 보이지 않는 힘의 균형의 결과였고, 이 때문에 문신, 조왕신, 올래신, 고팡신 등 여성이 모시는 신들을 위할 수가 있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녁 만썩'의 사상, 즉, 독립적인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부부·가족·제도를 유지하려는 자율적이고 공존의 사상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옥양목에 실타래 문전 신체.

문전본풀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남선비는 부인 예산국과 아들 일곱 형제가 같이 살고 있었다. 그 일곱 형제가 날마다 배고파 우니 남선비는 할 수 없이 부인이 만들어준 양태를 싣고 육지로 장사를 떠나야 했다. 남선비는 육지에 도착했지만 '노일저대구일의 딸'의 꼬임에 넘어가 배의 양태를 모두 잃고, 알거지가 되었고 남선비는 할 수 없이 '노일저대구일의 딸'의 제안을 받아들여 살림을 차리고 벼 껍질 죽으로 연명하고 종처럼 살고 있었다. 급기야 부인 예산국은 삼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선비를 찾아 나서 극적으로 눈까지 먼 남선비와 상봉하게 되었으나 예산국은 '노일저대구일의 딸'에게 깊은 못에서 죽임을 당하고, 예산국으로 변장한 '노일저대구일의 딸'은 남선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들들은 지금의 어머니가 가짜이고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아들이 '노일저대구일의 딸'에게 복수를 하여 변소 디딜팡(便器)에 목이 걸려 죽게 했다. 일곱 형제는 어머니 예산국을 환생시켜서 찬 물 속에서 오래 지냈었기에 따뜻한 부엌으로 모셔 제물을 받는 조왕할망이 되게 했고, 아버지 남선비는 문신이 되어 제사를 받게 했으며, 악랄한 첩인 '노일저대구일의 딸'은 변소를 지키는 신으로 변소 동티를 내어 살아가는 신이 되게 했다. 큰 아들은 올래의 정주목 신이 되었다. 나머지 여섯 아들은 하늘로 올라가면서 큰 형의 눈을 빼어 북두칠성이 됐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부엌과 변소는 서로 멀어야 한다는 말은 곧 위생적인 면에서나 씨앗이라는 불편한 관계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이 문전본풀이 여러 이본(異本)에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남선비가 미역이나 양태를 배에 싣고 팔러 가는 내용이 등장한다. 미역은 조선의 인기 있는 해산물이었으며, 양태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무역품이었으나 조선 최고의 나들이 모자로 인기가 높아지자 육지 곳곳에서 값싼 양태가 쏟아져 나오면서 19세기 제주 경제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문전제는 여러 유형이 있다. 조상 제사 때 지내는 것, '문전'을 위한 '문전빔'은 정월 초하루에 지내는 것, 결혼식이나 군대 갈 때와 같이 특별한 문전제가 있으나, 그 맥락은 모두 출타시 안전을 비는 것이다. 문전제 잡식(제물)은 올래직이 신을 위해 올래에다 뿌리고, 다시 문전상의 제물은 부엌에 가져가 여성에 의해 삼덕 조왕할망의 상징으로 세 개를 만들어 솥덕에 올린다. 고팡의 안내(안칠성)에게는 따로 제물을 올리거나 밧칠성에게는 따로 코시를 하기도 한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6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