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 돋아나는 새싹, 꼬물거리는 아기 강아지, 입 벌리는 아기새. 이 험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고 연약한 것들은 그렇게 갖은 정성으로 자라나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근간에 아동학대가 화두다. 기사 머리엔 "얘는 이렇게 애를 때렸고, 쟤는 저렇게 애를 쥐어 팼다더라"는 게 요리 레시피보다도 더 자세하게 열거된다. 가해, 방관, 희생이라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기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다.
한참을 올려다 봐야 하는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눈에 아주 큰 사람이다. 신경질을 부리고 짜증을 낼 수도 있지. 그게 인간이지. 하지만 성인과 아이는 완력을 두고 보면 강자와 약자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은 한쪽에겐 봉변이다.
작은 생명들이 부모를 쳐다보는 얼굴에선 '정말 나에겐 너밖에 없어'라는 메시지가 읽힌다. 먹고 입고 씻는, 나의 모든 두 손 두 발을 부모에게 온전히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완력에 당한 경험이 몇 번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처절한 무력감이 스치는 굴욕적인 그러한 경험을, 나의 두 손 두 발을 도맡은 이에게 당했을 때 작은 생명이 느꼈을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묵직하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시야 밖에서 매맞고 있을 지 모르겠다. 아동 정책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죽어나가야 비로소 어른들이 아동의 안전에 관심을 돌린다는 슬픈 뜻일 터다. 불편하다고 고개를 돌리면 결국 해결되지 않는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는 '어린왕자'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다혜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