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한 통의 긴 편지에 체제 유지 맞선 반전 선언

[책세상] 한 통의 긴 편지에 체제 유지 맞선 반전 선언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3기니'
  • 입력 : 2021. 09.24(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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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하'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그는 '귀하'와 '저희'의 소통이 어렵다는 말을 꺼낸다. 만나면 같은 억양으로 대화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고, 만찬 중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정치와 국민, 전쟁과 평화를 화제로 삼을 수 있으나 그 사이엔 깊은 심연이 있다고. 이쪽에서 무슨 말을 한들 저쪽에 닿을까 하면서 보낸 시간이 3년이라며 그는 묻는다. "고학력 남성의 누이에게도 영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커다란 축복"일까요?"

20세기 탁월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버지니아 울프(1882~1941). 1938년 발표된 울프의 에세이 '3기니'는 아웃사이더인 여성 작가가 전쟁을 막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남성 법조인에게 보내는 한 통의 긴 편지 형식으로 쓰여졌다. 에세이 속 '귀하'는 허구의 인물인 남성 법조인이고 '저희'는 '고학력 남성의 딸들'을 일컫는다.

표제에 등장하는 기니는 화폐 단위의 이름이다. 1816년 화폐법에 따라 영국에서는 기니 주화가 없어졌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치품의 신용 거래에서 기니 단위가 사용됐다. 런던의 명의와 면담할 때 1회 진찰료가 3기니였다.

에세이 '3기니'에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녹아있다. 그 시절의 공론장에서 가장 큰 권위를 휘두르고 있는 유력 인사들에 대한 실명 비판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울프는 누이들의 희생과 원조로 지탱된 남성 엘리트 교육의 실패를 지적하고 남성 중심의 국가주의가 벌이는 전쟁에 반대하되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 대신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반전, 평화, 비폭력의 비전을 제시한다.

'3기니' 집필을 위해 울프는 사전에 신문 기사, 전기와 역사의 인용문, 자신의 논평 등을 모은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남녀의 격차를 지표로 보여주고 국내외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 나섰다. 이 편지에 달린 상당한 분량의 주석들은 단순한 서지 정보에서 소논문의 완성도를 갖춘 글까지 다양하고 편지 속 편지, 픽션과 논픽션 등을 오가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글쓰기 방식을 보여준다. 김정아 옮김. 문학과지성사. 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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