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로맨스가 필요해

[영화觀] 로맨스가 필요해
  • 입력 : 2021. 12.03(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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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

로맨스는 가장 일상과 가까운 장르다. 어쩌면 오늘 내게도,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하고 익숙한 사건들로 만들어진 장르인 로맨스. 일상성을 기반으로 하는 로맨스 장르의 자장 안에는 흥미롭게도 신파도 코미디도 심지어 액션과 재난 영화도 아무렇지 않게 들락날락한다. 마치 열린 문 틈으로 쏟아지는 기후변화의 습격처럼 말이다. 당장 우주로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타인의 우주를 헤매는 일은 언제든 바로 가능하고 화산의 폭발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애타는 상대 때문에 천불이 나는 속을 달래는 일은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염증 같은 증상이다.

 그래서일까 로맨스 영화는 느닷없이 평범한 일상의 시공간에서 캐릭터와 관객들을 순식간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방금 전 까지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진 나, 우연히 마주쳤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너라는 두 존재의 강렬한 맞닥뜨림은 태풍, 해일, 폭우, 번개 등 어떤 자연 재해와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놀랍게도 로맨스 장르 안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대신에 의미심장한 눈빛 한 번, 가슴에 박히는 대사 한 줄이 이 마법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장르 보다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라는 영화를 구성하는 주요 구성원들의 기본기를 요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2021년 11월 극장가에 공교롭게도 제목에 '로맨스'가 들어간 두 편의 한국 영화가 연이어 개봉했다. 배우 출신 조은지 감독의 '장르만 로맨스'와 독립영화 진영에서 두각을 보이던 정가영 감독의 '연애 빠진 로맨스'는 여성 감독의 상업 장편 데뷔작인 동시에 한동안 명맥이 끊긴 것처럼 드물게 개봉하던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귀환이란 측면에서 반가운 작품들이다.

 두 편의 영문 제목은 각각 'Perhaps Love'와 'Nothing Serious'다. 오히려 국내 개봉 제목 보다 영문 제목이 각 영화의 성격을 좀 더 흥미롭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사랑일지 몰라 설레면서도 망설이는' '장르만 로맨스'의 주인공들과 '심각할 필요 없이 만났다가 만날수록 심각해지는' '연애 빠진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일견 로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각본, 연출, 그리고 연기의 꼼꼼한 디테일이 두 작품 모두를 새로운 결과물로 탄생시켜 흥미로운 감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장르만 로맨스'는 흔히 금기라고 부를 법한 상황에 놓인 커플들이 다수 등장한다. 동성의 교수를 사랑하는 제자, 전 남편의 절친과 연인이 된 여자, 옆집 기혼 여성을 사랑하게 된 고등학생이 극의 앙상블을 이룬다. 범법은 아니지만 세상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관계에 놓인 이들에게 영화는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상대가 힘들어하면 공감하고 서러워하면 다독이며 결코 서둘러 등을 돌리지 않는다. 또한 주,조연과 단역의 분량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등장 인물들에게 균등한 시간을 배분해 각기 다른 사랑의 경중을 나누지도 않는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무죄이며 당신 곁의 우리가 그 변호인이 되어 주겠다는 만든 이들의 이 다짐은 예상한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인상적인 결말을 선사하며 흐뭇함을 남긴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가볍게 시작해 무거워진 지금을 감당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성적 욕망을 해소하고자 시작한 둘의 계약은 빈도 수가 늘어날 수록 초심을 잃는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인간은 기계적일 수 없고 사랑이란 감정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발칙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솔직하게 연애담을 다뤄왔던 정가영 감독은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연애 빠진 로맨스'라는 드라이브에 인상적인 표지판과 풍경들을 심어 놓으며 관객들의 마음을 주저 앉힌다. 대체적으로 경쾌한 속도감으로 진행되는 '연애 빠진 로맨스'는 때론 다소 느리게 인물의 심경을 훑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 낯선 시선과 호흡이 더해져 결과적으로 완급 조절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결과물로 완성되었다.

 언제나 모두에게, 로맨스는 필요하다고 두 작품은 관객들을 유혹한다. 사랑에 빠지면 구조해주겠다는 호언장담으로, 사랑이 식으면 데워주겠다는 자신만만으로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 같이 느껴졌다. 극장 밖은 추웠고 서로를 부여잡은 이들의 곁에선 온기를 넘어선 열기가 순식간에 훅 끼쳐왔다. 짝을 찾은 이들의 융통성 앞에서 나는 우연과 운명을 떠올리는 모든 순간이 유익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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