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서두르지 않아도

[영화觀] 서두르지 않아도
  • 입력 : 2022. 01.07(금)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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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

새해가 왔다, 또 다시. 연말의 여흥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 위에 설렘과 부담감이 샌드위치 속 재료처럼 얹혀지는 연초는 여러모로 두근거리는 시기다. 의도하지 않게 프리랜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월요병의 염증도 없고 출근에 대한 걱정도 없이 살고 있다. 그렇다고 걱정이 없을 리는 당연히 없다. 지난해 단기계약으로 했던 일은 종료됐고 운 좋게 얻게 된 경제적인 기회들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의 월급과 바꾼 자유는 나른하게 달콤하지만 덜컥 깨물게 되는 불안의 알갱이는 쓰디 쓰다. 이러한 조급한 마음이 겨울의 찬바람과 만나던 평일 오후, 사울 레이터라는 사진작가의 전시와 그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갔다. 인기리에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던 전시장은 평일 오후에도 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조용한 활기가 가득했고 소규모 상영관에는 진지한 시선들이 세상을 떠난 한 예술가의 삶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전시와 영화를 보는 반나절 동안 나는 돈을 벌기는 커녕 쓰기만 했는데 신기하게도 입 안의 쓴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불안의 바람으로 흔들대던 비어있던 마음이 좀 차분해 졌고 누군가의 삶이 남긴 조각들이 그 자리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영화 '캐럴'의 토드 헤인즈 감독이 기획 단계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사진작가 사울 레이터는 세상에 나서기를 꺼려했던 은둔의 사진작가다. 1923년생으로 영화가 발표된 2013년 세상을 떠난 사울 레이터는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자 그저 카메라가 손에 들렸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컬러 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의 사진들은 특유의 서정과 예민한 색감이 어우러진 독보적인 결과물로 전세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평범하지만 비범한 예술가의 삶은 들여다 보는 다큐멘터리 영화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는 제목 그대로 '서두르지 않는' 삶의 면면을 사울 레이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담아낸 영화다. 13개의 소제목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사울 레이터라는 한 사람의 특별한 인생 사진첩이기도 하다. 무려 55년 동안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살며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겹들을 발견해 자신의 카메라에 기록한 그의 시선과 방향을 담고 있는 영화는 자료와 추억이 어우러진 그의 흔적들을 또 다른 카메라에 담아낸 작품이다.

 사울 레이터는 유명인보다 빗방울을 찍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판자의 틈과 유리창 너머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바라본 작가다. 또한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가 지상의 것들을 어떻게 변모시킬 수 있는지를 탐미적인 시선으로 관찰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그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봐요. 사람들이 심각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심각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은 실제로 걱정할 가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측면에서는 서툴러 보이기까지 한다.

 먼지 쌓인 짐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커피 한 잔을 능숙하게 타지도 못하며 인터뷰 중에도 매끄러운 화술을 구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이 아닌 것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들에게 지극하다. 그 지극함이 어쩌면 고집쟁이처럼 보일 수도 있는 그에게 천진한 호기심과 간곡한 애정을 가진 눈동자를 갖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산책을 하고 익숙하거나 낯선 이를 만나고 눈 앞에 있는 세상을 눈 안에 담아 그저 손에 들려있는 카메라 안으로 가져온다.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울 레이터는 그렇게 누군가의 순간을 모두의 시간 안에 저장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의 사진이 남긴 순간을 그와 다른 시간 위에서 찾아낸 누군가는 또 다른 이의 순간을 발견하는 산책을 떠나게 된다. 나 또한 그를 만난 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의 카메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으며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 그 감정을 둘러싼 순간의 공기를 담으며 정지된 시간이 주는 고요 속에 평화로웠다. 이 평화가 불안을 덮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불안이 찾아오는 순간 그 앞에서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생에는 서두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수많은 감정의 방문객 중에 내 안으로 들일 손님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몫일 테니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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