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25)정원사의 계절

[황학주의 제주살이] (25)정원사의 계절
  • 입력 : 2022. 03.15(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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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줄기를 지지대에 붙이기 위해 연장통을 들고 마당에 나와서 본다. 빈 꽃밭이랄 수 있는 벌거벗은 화단에 수줍은 색감이 돌고 있다. 눈풀꽃들이 눈에 띌 듯 말 듯 피어 있던 겨울 동안 정원은 묵묵히 연두색을 연습하고 있었다. 서서히 송진을 뚫고 나오는 잎들이 있고, 흙을 밀고 나오는 줄기들이 있다. 이것들은 인간이 손을 보지만 사실은 자연의 작품이며, 자리를 내주고 죽고 변하는 생명체들의 작은 세상이다.

지난해 무너진 돌담을 쌓고 보강하느라 인부들을 불러 작업을 한 후 열을 많이 받았다. 은방울꽃들은 뽑혀서 보이지 않고, 레몬나무 가지는 일부가 잘려 나갔으며, 잡풀과 야생화를 구별못하는 인부들이 돌담 밑이나 화단 밑에 심어놓은 낮은 풀꽃들도 뭉개놓았다. 그분들이 무심히 뽑아버리거나 짓밟은 야생화들이야말로 구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 많다. 그런 풀꽃들을 다시 심을 만한 자리를 봐두어야 한다.

덩굴시렁을 타고 뻗어 있는 포도나무 두 그루는 늘 상태가 좋지 않다. 옛 주인이 일부 마당을 다지며 진흙을 쓴 탓에 포도나무에겐 척박한 자리가 되었다. 그래도 포도 열매 맺는 것을 보면 포도나무가 맞다. 완전히 죽어버린 나뭇가지나 나무둥치도 다시 싹을 틔울 수 있지만, 그러려면 정원사의 솜씨가 좋아야 한다. 큰 느릅나무들이 있는데 잘 우거지고 관리가 어려운 수종이라 내가 귀찮아 한다는 말을 듣고 이웃집 박 선생이 내게 구박을 한 적이 있다. 조경하는 데에 느릅나무가 얼마나 귀한 수종인지 아느냐며.

나는 작은 꽃을 선호해 화단 관리가 더 힘든 형편이다. 장미도 꽃이 작은 종이어서 가까이 가서 들여다봐야 돌 밑에 피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작년에 잔디를 반쯤 파내고 거기에 밟아도 되는 애기물망초를 심었다. 작은 흰꽃들이 마당의 일부를 완전히 덮는 봄부터 늦가을 사이에 손님이 오면 놀라곤 한다. 작고 연약하게 핀 꽃들을 밟고 다닌다는 것에 놀라고, 밟을수록 모양이 예뻐지고 튼튼해진다는 사실에 놀란다. 애기물망초들은 아직 땅에 바짝 붙어 말라있는 듯 보이지만 지운 것을 되살리려는 갈색으로 숨을 쉬고 있다.

정원 일을 하다보면 육지에서 우편물이 온다. 대개는 모르는 시인들에게서 보내져 오는 시집들인데, 잠시 일손을 놓고 마당 테이블 의자에 앉아 봉투를 뜯어 시집의 첫 번째 시를 읽을 때 정원사의 마음은 신선하고 내가 있는 곳에 당신이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 이웃하는 숲속에 딱따구리와 휘파람새가 와서 울면 우리집 정원은 완성된다. 갈퀴로 나뭇잎들을 걷어내면 말라버린 것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듣기 좋고 낙엽 태우는 냄새는 향긋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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