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마침내, 박해일

[영화觀] 마침내, 박해일
  • 입력 : 2022. 08.05(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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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용의 출현'.

[살인의 추억]의 얼음 같던 용의자와 [국화꽃 향기]의 첫눈 같던 순정남, [연애의 온도]의 능글맞기 그지 없는 수작과 [질투는 나의 힘]의 애처롭고 답답한 호소, [은교] 속 특수 분장을 뚫고 나오던 형형한 눈빛과 [나랏말싸미]의 삭발로 더욱 또렷하게 다가오는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사랑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적군 앞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헤어질 결심]과 [한산:용의 출현]의 주인공 박해일. 2022년은 배우 박해일의 파도가 거세가 몰아치는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1년 [최종병기 활]이후 주요 영화상의 트로피를 수상한 적이 없는 상복 없는 박해일이지만 아마도 올해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박해일은 2000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한 무려 23년차 배우다. 영화 데뷔는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이고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개봉작 수가 극히 적었던 2019년과 2020년을 제외하고는 데뷔 이후 모든 해에 개봉작에 출연한 배우이자 단 한 편의 드라마 출연도 하지 않은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또한 천만 영화 [괴물]과 독립영화 [경주]를 오가는 폭 넓은 스펙트럼의 배우이자 박찬욱과 봉준호, 허진호와 한재림, 장률과 김한민 등 다채로운 개성의 감독들과 매끄러운 협연을 완성시키는 배우이기도 하다.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는 믿음직하고 범죄물에서는 누구보다 의뭉스러우며 코미디에서는 특유의 박자를 구사하는데다 시대극에서는 매번 새로운 얼굴로 등장하는, 도무지 실제 나이가 짐작이 가지 않는 배우 박해일은 올해 여름 극장가에 두 편의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만개한 배우의 빛깔과 향기로 관객들의 오감을 뒤흔들고 있다. 이 단일한 배우의 지금은 짙고 아득하며 눈부시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속 박해일은 단정하고 꼿꼿한 형사 해준이다. 현대인 중에서 두드러지게 단아한 매력을 지닌 그는 매사가 깔끔하며 배려심이 넘친다. 또한 잘 뛰고 눈치가 빠르며 감각이 예민한 데다가 잘 감격하는 심장까지 가지고 있다. 그는 서래라는 파도가 자신의 뭍으로 들어올 때 발을 빼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붕괴되고 나서도 다시 망망대해에 뛰어드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아니 도대체 이런 희귀한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로 박해일이 아닌 누가 떠오르는가. 해준은 담대하고 위엄 있는 서래 앞에서 완벽하게 깨어지고 무너지지만 배우 박해일은 단 한 순간도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은 이제까지 그가 보여줬던 모든 연기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큼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며 텍스트를 발화하는 탁월한 감각으로 영화의 말맛을 관객의 입 안에서 맴돌게 만든다.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속 박해일은 무너지고 깨어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장군 이순신이다. 아마도 그의 출연작 중 가장 대사가 적은 영화가 아닐까 싶은 이 작품 속에서 박해일은 성웅의 번뇌를 자신의 얼굴 안에 가둔다. 미세한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말하기도 하는데 해전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마치 정박한 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영화가 속도를 내는 순간에도 박해일은 여전히 그의 온도로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침내 몹시도 중요한 말을 해야하는 순간에서 그는 온 힘을 비축한 듯 묵직하게 장면을 발포한다. 말 그대로 바다에 우뚝 솟은 산과도 같은 존재감이다.

배우 박해일은 송강호나 김윤석, 최민식처럼 불 같은 강렬함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뜨겁게 만든 배우는 아니다. 오히려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영화의 미세한 온도를 조율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그는 앙상블 속에서 튀지 않았고 상대 배우와 자신의 배역에게 먼저 스스로의 자리를 내어준 배우다. 올해 관객들은 제대로 농익은 이 배우의 진가를 맛보고 있다. 떨리는 눈빛으로 사랑을 증언하던 박해일도 , 요동치는 심장을 온 힘으로 부여잡고 바다의 한복판에서 물러서지 않던 박해일도 우리가 몰랐던 박해일이다. 나는 영원히 그의 패턴을 모르고 싶다. 그가 오를 더 많은 산들과 바다들에 기꺼이 따라가고 싶을 뿐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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