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란 내 고유의 행동 방식과 품성을 말한다. 그런데 성격이 누군가에게 고유한 것이라 해서, 한 사람이 언제나 일관된 성격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때로 나 자신조차도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집에서는 바보 같은 행동들로 온 가족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익살꾼 막둥이가 밖에 나가서는 매우 진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다중 자아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한 사람이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갖기 때문에 벌어지는데, 성격과 대비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성격의 속성이다. 삶이란 내 속의 많은 자아가 번갈아 역할을 바꿔 맡는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돌아가신 환자의 가족을 초청해 가족이 경험한 돌봄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십 수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은 아버지를 수발한 가족이라면 치매 돌봄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전문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돌봄 강의의 마지막에 환자 가족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해 남긴 말은, 더욱더 특별하게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버지는 우리의 돌봄을 받다 가셨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 평생 돌봄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환자를 돌보는 것, 특히나 치매 어르신을 돌보는 일은 항상 아름답지는 않은 일이다. 몹시 험하고 괴로운 일에 가깝다. 그 힘든 시간을 보내고도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을 간직한 가족을 보니 그 과정을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존경스럽고도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들의 돌봄을 받고 자란 우리는 젊고 건강할 때 남에게 돌봄을 주다가, 늙고 병들어 다시 돌봄을 받는다. 그 사이 사이에도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아플 때 등 인생의 순간순간에 수도 없이 서로 역할을 바꾸며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산다. 그러고 보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역할을 담당했고, 무얼 얼마나 줬고 받았느냐가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사실인가 싶다.
아흔이 넘으신 나의 외할아버지가 이제는 서서히 삶을 마무리 할 단계에 접어드신 것 같다. 손주를 돌보러 미국에 오셨던 어머니는 이제 당신의 아버지가 가는 길을 돌보기 위해 할머니에서 딸로 역할을 바꿔 고향 제주에서 외할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오가고 계신다. 나도 곧, 의사에서 손녀로 옷을 갈아입고 외할아버지를 보내 드리러 가려 한다. 친할아버지는 내게 따뜻했던 기억만 주시고 돌봄을 되돌려드릴 겨를도 없이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셨는데, 외할아버지는 건강히 오래 사셔서 이젠 잠시나마 내게도 돌봐 드릴 기회를 주시는 게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의사, 보호자, 간병인, 손녀의 자리를 번갈아 가며 잘해 나가고 싶다. 그리고 이 순간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이소영 미국 하버드의대 정신과 교수·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