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도청과 도의회의 뿌리를 찾아서

[문영택의 한라칼럼] 도청과 도의회의 뿌리를 찾아서
  • 입력 : 2022. 09.27(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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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도지사는 관청의 우두머리이고 도의회 의장은 향청의 우두머리이다. 관청의 뿌리는 관아이고 향청의 뿌리는 향사당이다.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제주목 관아와 향사당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1448년 지어진 관덕정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큰 틀만큼은 온전할 수 있었다. 제주영에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목사의 집무처인 상아, 남쪽에는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 상아와 이아 사이에는 향사당이 있었다. 지금의 행정체계로 본다면 제주영인 목관아의 상아와 이아는 도청과 시청에 해당하는 관청이고, 향사당은 도의회에 해당되는 향청이다.

전국적으로 설립된 향사당에서는 봄·가을에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열기도 하면서 고을의 당면 과제들을 논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 향사당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들어선 유향소라는 자치기구에서 유래하며 임진왜란 이후 향청으로도 불렸다. 조선 초기에는 향사당이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나, 후기에는 관아 부근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초기의 향사당은 수령을 견제하다 점차 보좌하는 역할로 변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좌수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향청의 향회에서 우두머리인 좌수를 선출하고 좌수는 별감 이하의 직원을 선정했다. 좌수는 수명의 별감을 향사당에 뒀는데 별감은 지방 풍속 순화와 수령 보좌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향사당 역시 같은 변화를 보인다. 가락천 서쪽에 처음 건립됐던 향사당은 1691년 판관 김수에 의해 찰미헌(이아) 인근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그리고 1797년 유사모 제주목사가 향사당의 射(사)를 社(사)로 바꿔 제액했으며 1975년 제주도유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됐다.

제주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는 1909년 향사당에서 개교했다. 마르셀 라쿠루 신부는 향사당을 교사로 활용해 제주사립신성여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교 7년 만인 1916년 일제에 의해 폐교 당했다. 일제는 학교건물을 빼앗아 혼간지라는 절을 세워 일본인 거류 사망자들의 유골 안치소로 이용했다. 광복 후 1회 졸업생인 최정숙 등이 학교 재건을 추진한 결과 1946년 신성여자중학원이란 이름으로 향사당에서 다시 개교했다.

흔히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2000년 전후해 복원된 상아를 목관아라 부른다. 하지만 목관아의 한 쪽인 이아는 전혀 복원되지 않은 채 도립병원과 제주대학교병원 등이 들어섰다가 철거된 후 명칭만 이아로 불리고 있다.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향사음례를 치르기도 했던 드넓은 향사당은, 반에 반쪽짜리도 아닌 왜소하고 초라하게 복원돼 있을 뿐이다.

정체성은 뿌리 깊은 나무이자 마르지 않은 샘과 같은 거다. 향사당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굴곡지고 왜곡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향사당은 우리의 문화지수를 대변하듯 외롭고 원망하듯 서 있다. '탐라 천년의 도읍지'였던 제주시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문화에 대한 무관심이고 방임과 방치인 듯하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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