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제주역사의 복원

[문영택의 한라칼럼]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제주역사의 복원
  • 입력 : 2022. 11.15(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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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최근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학술 세미나와 방송 영상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있어 다행이다. 1555년(을묘년) 전라도의 영암과 강진 등을 침범했다가 조선군의 반격으로 쫓겨난 왜구 1000여 명은, 40여 척에 동승해 그해 6월 화북포로 상륙한 후 높은 구릉에서 화살을 날리며 제주읍성을 공격해왔다. 전투 3일째 되던 날, 당시의 제주목사 김수문은 정병 김몽근 등 병사 70명으로 편성된 효용군(驍勇軍) 특공대와 4인의 치마(馳馬)돌격대로 하여금 남수각에 포진하고 있던 왜구들을 역공케 했다. 이 전투에서 치마돌격대인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의 맹활약으로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아군이 일제히 공격해 크게 승리했던 것이다. 제주 군민(軍民)의 과감한 선제공격과 뛰어난 궁술과 기마술로 왜구를 무찔러 대승을 거둔 이 전투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영암의 수성(守城)과 제주의 파적(破賊)'이라는 제주대첩으로 기록했다. 전라도 영암 지역은 성을 지켜냈고, 제주에서는 왜적을 격파해 승첩을 일궜음을 뜻한다.

승전을 보고받은 명종은 목사, 판관, 현감 등에게 상을 내리고, 특히 제주선인인 김성조와 문시봉에게 종3품 건공장군을 제수했다 전한다. '제주선현지' 등의 역사서에는 김성조·문시봉의 공적이 기록돼 있다. 김수문 목사는 다음해인 1556년 목관아의 가장 높은 건물인 망경루도 건립했다. 궁성을 바라보며 임금의 은덕을 기리는 한편,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는 의미로 지은 것이리라.

을묘왜변에서 제주관민은 크게 승리했지만, 반면 취약점이 있음도 알았다. 지대가 높은 동쪽에서는 성안 대부분이 적에게 노출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식수를 제공하는 산지천이 성 밖에 있어 장기전 시 성안이 식수문제로 곤란을 겪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읍성 확장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곽흘 목사는 1566년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확장해 동성(東城)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나 1910년대를 거치며 성문이 사라지고 1920년대 제주축항 공사 시 성담 대부분이 허물어졌다. 성문을 지키던 돌하르방들은 제자리를 떠나 아직도 방황중이다.

을묘왜변 후 쌓은 동성은 역사적 교훈의 산물이자 상징이다. (사)질토래비에서는 4년 전부터 '동성·돌하르방 걷는길'을 개장해 도민들과 함께 걷고 있다. 이 길은 성문을 지키려 1754년 제작된 돌하르방 24기 중 2기가 있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출발해 돌하르방 4기가 있는 삼성혈 올레, 최근 역사공원으로 조성된 운주당, 특히 을묘왜변의 현장인 제주성지와 남수각을 거쳐 동성의 유적이 있는 골목과 제주기상청 등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일제가 파괴한 제주읍성과 돌하르방의 방황에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읍성 성문을 복원하고 성문을 지키던 돌하르방을 제자리에 옮기는 것은 최소한의 제주역사의 복원이리라.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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