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단풍이 질 무렵이면 건축계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각종 행사가 연속된다. 올해도 건축전시와 포럼 등의 기획과 참여로 힘든 일정 가운데, 전통 있는 건축 전문 저널에서 한 건축가의 비평을 의뢰받았다. 조심스럽고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지역건축가로서의 조명이 기획의도라는 잡지사 측의 설명에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널에서 소개하는 건축가는 울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정웅식이다. 수년 전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해 세상에 알려지더니, 최근에는 굵직한 건축상에 자주 등장하는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가 됐다. 지역에서 성장한 건축가로서 쉽지 않은 성과와 건축을 선보여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그의 건축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며칠 후 그의 작품을 둘러보기 위해 울산으로 향했다. 서로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는 사이지만 건축가와 비평가로서의 만남은 다소 생소했다. 건축가의 작품세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비평의 필터를 세워야 하고, 그 단서는 그가 자란 환경, 교육 그리고 건축가로의 수련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답사 일정 내내 그의 삶을 묻는 대화는 계속됐다. 울산 밖을 나서보지 않은 토종 건축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주목하는 건축가로 성장한 의구심은 서서히 풀려갔다.
그는 어린 시절을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첩첩산중의 자연 속에서 지냈다. 가지산, 운문산 등으로 이뤄진 깊은 산세로 말미암아 그의 독특한 공간적 차원감각이 형성됐고, 이는 벽을 겹겹이 세워 공간의 깊이를 만드는 건축에 연계된다. 또한 학창시절 제도권 교육의 매너리즘에 대항해, 지역의 전통건축인 부석사, 독락당, 향단 등을 즐겨 다녔는데 이 시절 건축이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 울림은 건축에 누적돼 있는 시간성, 자연과 일체화된 풍경에서 비롯된 것이고, 시간을 담고자 하는 그의 건축에 작동한다. 이렇듯 자연환경에서 얻어진 차원감각, 지역 전통건축의 체험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구조의 동시대적 현상들이 어우러져 정웅식 건축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비평은 그의 건축을 새로운 지역성 건축의 최전선에 포지셔닝하며 마무리됐다.
그 후, 경주 양동마을의 독락당과 향단의 도면을 다시 읽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회재 이언적과 모친을 위한 집이다. 그런데 자연과 세상을 향한 두 건축의 대응이 500년을 지나 지역의 건축가에게 그대로 전해져 있음을 발견했다. 이 순간 묘한 반전의 전율이 있다. 특별한 스승이나 어떠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 했다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이 감동했던 건축을 매개로 조선 성리학의 사유가 그의 건축에 계승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비형식적 건축가라 자칭했던 어느 지역건축가와의 만남에서, 오히려 '비참조 건축'의 가능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제주 건축가들에게 이언적의 건축과 같은 레퍼런스는 무엇일까?'하는 상념에 젖는다. <양건 건축학박사·가우건축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