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마을 지명들이 항파두리 항전의 역사가 서린 곳들로 가득한 마을이다. 사람들은 세월 속에 사라져도 땅 이름은 오래도록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그러하다. 항파두리와 불가분의 역사를 가진 제주의 유서 깊은 이 마을공동체가 보유하고 있는 희망과 좌절의 시간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옛날 쌓은 토성에 올라서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면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아시아와 유럽, 아랍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몽고에 항거해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의 혼이 남아있는 곳.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항파두리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후세에게 비굴하지 않은 선조로 떳떳한 죽음을 선택한 자들에 의해 역사는 동력을 제공받는다. 항복보다 싸우다 죽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 죽을 것이 뻔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에 의해 새봄에 순이 돋아날 씨앗이 돼 땅 속에 묻힌 것이다. 항파두리의 존재 의미는 '살기 위한 굴복은 싸우다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정신에서 비롯한다. 여몽연합군의 군사력이 자신들보다 수 십 배에 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삼별초가 끝까지 항전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굴한 삶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죽음. 객관적으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세력과 끝까지 싸운 장소이니 항파두리는 세계사의 한 자락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기백은 세계인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 줄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지만, 그 자부심에 비해 오늘의 현실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이기는 길만을 찾는 세상에서 항파두리는 무척 외로워 보인다.
행정구분의 입장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던 지역의 의미로 고성1리는 항파두리 토성에서 유래됐음을 알수 있다. 그 역사성이 마을 명칭이 된 것. 수 백년을 여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서 수 없이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의 신화적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 아이들이 할아버지가 되면 손자들에게 들려줬던 역사. "왜 저런 흙더미로 된 성이 있냐"고 물으며 대답해줘야 할 의무가 어른들에겐 있었으니까. 항파두리 삼별초 정신은 고성1리 조상들의 공통분모가 됐던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에 의하면 원래 상귀리와 한 마을로 살다가 분리됐다고 한다. 4·3 이전에는 초등학교도 있었다고 했다.
1978년 항파두리성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마을 발전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45년을 개발행위나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 결과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상황이다. 이러한 마을공동체의 엄청난 피해와 손실을 외면하는 행정의 일관된 모습에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해 행위를 제한하게 되면 주민 피해가 동반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국가가 문화재로서의 중요성을 인정해 지정했다면 주민의 피해까지 책임 져야 한다.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 증대를 위한 대폭적이고 파격적인 투자를 통해 농외소득 증대의 길을 열어줘야 항파두리의 가치는 미래에도 존중받을 것이다. 이 매력적인 역사자원을 활용하지 못하는 행정력이 더욱 큰 문제다.
김영수 이장에게 고성1리 주민들의 자긍심을 묻자 함축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박력 있다는 것입니다." 주민 결속력의 관점에서 나온 표현이었다. 개발과 관련해 제약받는 세월이 오래 지속되면서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부 유입인구가 적다는 것은 조상 대대로 함께 살아온 주민들끼리 의기투합해 어떠한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 강력한 공동체의식이 발동해 대범하게 마을사업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토록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마을공동체 정신을 보유한 마을임에도 문화재행정이라는 족쇄 아닌 족쇄에 묶여서 심정적 절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다. 어정쩡한 행정적 판단과 행위가 가져온 45년 동안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항파두리 보존과 마을 발전, 주민 소득향상을 위한 특단의 행정적 투자가 획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항파두리의 역사적 가치와 고성1리 주민들의 행복추구권이 상생할 수 있는 해법을 내놔야 할 책임자들에게 후손들은 묻고 있다. "언제까지 방관하겠냐?"고. 관계법령의 뒤에 숨어서 주민들의 원성에 더 이상 귀 막고 있어서는 안 된다. <시각예술가>
거북동산 가는 길
<수채화 79㎝×35㎝>
유서 깊은 마을 풍경이라 동양화의 요소를 가지고 그렸다. 서구 명암법이 가지는 한계를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우리네 어떤 서정성을 담아내고 싶어서다. 물상의 테두리를 그어 넣어서 선의 느낌에 따라 그 사물의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 분위기를 먼저 설명하는 방식. 빛에 반응하는 사실적 묘사보다 사물과 사물들이 짜여 있는 관계를 선들의 만남을 통해 우선시하는 가치관이다. 길의 근경을 여백의 공간감으로 형성하고 그 여백이 발생시키는 원근감에 의해 전체적인 공간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수채화와 동양화의 중간지대 정도를 담채느낌으로 고풍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과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만나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 고성천과 인접한 길, 남북으로 난 오르막길이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서 마을 목장에 마소를 돌보던 조상들의 발길이 서려 있는 길. 가축을 몰고 내려올 때는 내리막길이었으리라. 아름다움은 치장되어 얻어질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너무도 평범한 풍경, 거기에서 얻고자하는 마을사람들의 조용한 일상성을 품격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왼쪽 돌담을 구비 돌면 땔감 한 짐을 지고서 내려오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 옛날. 사람이 오르내리던 저 길에는 그림자처럼 사연도 따라다녔을 터이니 지금은 2월임에도 성급한 풀들이 연두색 싹을 내밀어 달콤한 바람을 만들어낸다. 새들이 지저기는 소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풍경 속에 살아가야 가능하다.
한라산이 성으로 보이는 곳
<수채화 79㎝×35㎝>
김통정 장군이 진도에서 들어와 요새와 같은 방어성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다녔을까? 작가적 상상력의 범주이기는 하지만 여기 항파두리를 정하기로 한 것은 동서로 고성천과 소왕천이 흘러서 천연 해자의 기능을 담당해주고 있어서 냇가 사이에 높은 지대를 요새로 확보한 소수 병력으로도 냇가를 넘어오는 대규모 군사들을 섬멸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한 현실적인 전술보다 더욱 종요한 것은 심리적 자신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올 적들의 뒤는 남쪽. 한라산 능선이 어디 산처럼 보이는가? 성처럼 하늘과 잇닿은 선들이 가로로 흐르고 있지 아니하냐! 섬 제주에서 한라산을 바라볼 때, 백록담과 가까운 부분들이 평평하게 하늘을 받든 모습으로 보이는 곳. 뒤에 장엄한 성을 두고 앞에 흙으로 아주 작은 성을 쌓았으니 항파두리다. 대기 상태가 뿌연 봄기운 감도는 날, 오후 햇살에 능선 아래가 평면처럼 느껴지는 한라산과 항파두리 토성의 거리감을 물감의 농도만 가지고 표현하였다. 한라성은 멀리 800년 전의 위치에 있고, 항파두리는 오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그 자리에 서있다. 거리가 먼 것이나 시간이 먼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은 마치 한 가지다. 약육강식의 야만적 질서 속에서 소수 약자의 기백과 생사의 선택을 느끼게 되는 곳.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 웅장한 성처럼 보이는 위치에서 한라산이 지켜주리라 여겼던 사람들의 염원을 그렸다. 아니, 그 위대한 신념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