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5)그날의 제주사람들 ①건공장군 김성조

[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5)그날의 제주사람들 ①건공장군 김성조
“소수 정예 병법으로”… 스물여덟 제주 청년 지략 통했다
  • 입력 : 2023. 06.27(화) 00:00  수정 : 2023. 06. 27(화) 17:06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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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기록된 '치마돌격' 주역으로 공로 인정 받아
종친회 산하 현양추진위 구성 영정 제작·동화책 발간
"신엄 생가 터 푯돌 설치 추진… 패배 의식 탈피 계기로"

[한라일보] 명종실록(1555년 7월 6일 기사)에 담긴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의 장계(狀啓)를 다시 인용한다. "6월 27일, 무려 1000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오른 4인은 제주침입자들에게 맞섰던 주역들이다. 번번이 왜구들에게 쓰러졌던 상황에 익숙했던 임금은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 일군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소식을 접한 후 "근심이 크게 감하여졌다"(명종실록)고 말한다. 그동안은 "잠자리조차 편치 못한 지가 여러 날"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명종은 주된 공을 김수문 목사에게 돌렸지만 "김직손 등 4인이 돌격한 공로도 역시 작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

제주시 애월읍 고내봉에 조성된 나주김씨입도조성역에 놓인 건공장군 김성조 묘비. 진선희기자

백미자 작가가 그린 건공장군 영정.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제공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 거둔 값진 승리=지난 15일 저녁 제주도문예회관 대극장. 도내외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그곳에서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 개막 축하 공연으로 제주대첩의 이야기가 무대에 살아났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주축으로 약 30명의 연극인들이 1인 2역 등을 맡아 이우천 작·연출로 '치마돌격대'를 초연했다.

1시간 분량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예부터 외세의 침략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으며 억압과 핍박, 고난의 역사가 잇따랐던 땅에서 제주대첩을 통해 승전의 역사가 새롭게 추가되는 여정을 그렸다. 을묘왜변을 제주의 눈으로 다시 보자는 논의가 확산되는 시기에 국내 최대 연극 축제에서 제주대첩을 소재로 빚은 창작극이 첫선을 보이며 화제가 되었다.

이 공연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인물이 '말 테우리'인 제주사람 김성조(1527~1575)다. 이제 막 제주 섬에 발을 디딘 김수문 목사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김성조는 날뛰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티며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김성조의 행적은 김석익의 '탐라기년'과 '탐라인물고', 담수계의 '증보탐라지' 등에도 기록됐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던 김성조는 현역 군인은 아니었지만 명종 때 왜를 격파한 공으로 건공장군 포상을 받는다.

그는 제주대첩 그날의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2021년 2월 나주김씨인충공파종친회 산하에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가 꾸려진 영향이 크다. 추진위원회는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해 제주지역에 건공장군의 존재와 공헌을 알리는 콘텐츠 구축과 홍보 활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작업으로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박재형 동화 작가를 통해 어른들도 함께 읽을 수 있는 '을묘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열림문화, 2021)을 내놓았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이 책의 증보판을 준비 중이다. 백미자 민화 작가에게 의뢰해 건공장군 영정도 제작했다. 영정은 현재 제주시 노형동에 마련한 임시 봉안소에 보관하고 있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창작극 '치마돌격대'로 되살아났다. 사진은 지난 15일 대한민국연극제 제주 개막 축하 공연인 '치마돌격대' 리허설 장면. 이상국기자

▶'장쉬 나자 용매 난다' 제주 속담 낳은 인물="제주 을묘왜변은 왜구들이 전남 해안의 제1차 을묘왜변에서 분탕질을 하다가 귀국 길인 6월 25~27일 고립무원의 제주성을 아예 점령하여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 했던 변란이다. 이 왜변은 방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통쾌한 용기와 패기, 지략으로써 승전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김순택 위원장은 제주문화원 기관지 '제주문화' 27집(2021)에 실린 '김성조 장군은 누구인가?'에서 제주대첩의 의미를 이 같이 짚었다.

이 글에서는 제주대첩 당시 28살이던 김성조가 김수문 목사에게 돌파 계획을 제시하며 "다수의 적을 이기려면 소수의 정예와 성동격서(聲東擊西) 병법으로 쳐야 함을 주장"하고 치마돌격(馳馬突擊)에 자원해 전승을 거뒀다는 대목을 강조했다. '장쉬 나자 용매 난다'(장군(將軍) 나니 용마(龍馬) 난다)는 제주 속담은 김성조 장군의 활약상이 온 섬에 퍼지면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지난 16일 건공장군 영정이 있는 임시 봉안소, 김성조 등 7대에 걸친 선조 묘를 한곳에 모신 제주시 애월읍 고내봉의 나주김씨입도조성역, 김성조가 태어난 신엄리를 차례로 안내하며 추진위원회에서 구상하고 있는 안을 들려줬다. 그 중 하나가 김성조 생가 터에 푯돌을 세우는 일이다. 신엄리는 고려 유신(遺臣) 김인충이 1403년쯤 화북포로 입도한 뒤 '남또르'로 불리는 곳에 은신하면서 설촌한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김인충의 가계는 신분을 감추며 반농반어로 김성조까지 180여 년을 신엄리에서 살았다. 지금은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 들어서는 등 마을의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그 흔적을 붙잡는 일이 쉽지 않지만 추진위원회에서는 표석 설치로 수백 년 전 제주대첩의 사람들을 기억하려 한다.

김성조 등 치마돌격했던 4인을 기리는 동상 건립은 장기적 과제로 뒀다. 예산 확보부터 난관이 예상되기 때문에 제주대첩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제주사회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순택 위원장은 제주대첩을 통해 "패배 의식에 차 있지 말고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을 길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진위원회에서 도내 모든 초등학교에 동화책 '을묘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을 배부한 것도 그런 바람에서다.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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