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지난 6월 13일 제주시 노형오거리 일본총영사관 건너편 도로에서 '일본 핵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한 제주 범도민대회'가 열렸다. 이날 제주 해녀들은 태왁 망사리를 불태웠다. 역사상 해녀들의 두 번째 대규모 항일시위였다. 해녀의 물질노동과 항일투쟁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해녀의 '물질'은 위험하고 고된 극한노동이다. 바다 밑에서 수면으로 올라온 해녀들이 태왁을 부둥켜안을 때마다 토해내는 가쁜 휘파람소리. 처량한 그 숨비소리가 울릴 때마다 물숨의 경계를 넘나들며 건져 온 전복이며 구쟁이며 해삼은 하나둘 망사리를 채워간다. 오랜 물질노동으로 인한 수압과 저산소증 때문에 해녀들은 중이염에 시달리고, 관절통과 두통을 달고 산다. 이러한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뇌신이라는 진통제를 상습 복용하는 해녀들이 많았는데, 내 어머니도 그랬다. 그래서 일제가 부르기 시작한 해녀(海女)라는 가치중립적인 말보다는 잠녀(潛女)가 중노동자의 정체성에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어쩌랴.
1930년부터 2년간 벌어진 항일투쟁은 시위참가 해녀가 연인원으로 1만7000명이 넘었고, 200번이 넘는 시위가 지속됐다. 1931년 봄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도사(島司)이며 해녀어업조합장을 겸직하고 있는 다나카(田中)에게 해녀들은 아홉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진정사항은 관변조직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조리한 운영방식과 일본 상인들의 수탈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는데,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1932년 1월 24일 도사(島司)가 세화주재소 앞 도로를 지나가는 날, 구좌면 하도리 출신 해녀 대표인 당시 스물두 살 부춘화(夫春花)가 1000명이 넘는 해녀들을 이끌고 주재소로 행진했다. 한 손에 빗창을 들고 흰 물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해녀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우리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더라/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바람 부는 날에도/저 바다에 나가 물질하고/돌아와 저녁밥을 지며/어린애기 젖 먹인다.
도사(島司)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 자리만 모면하려고 했다. 해녀들은 급기야 도사의 차량을 둘러싸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도사의 자동차는 해녀들이 던진 돌에 크게 부서졌다. 출동한 경찰은 해녀들의 기세에 몰려 주재소로 퇴각한 후 옥상에서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전남 경찰국은 100명이 넘는 경찰을 제주로 파견해 항쟁을 진압했다. 이 항쟁으로 해녀들 외에도 배후로 지목된 청년들까지 구속돼 심한 고초를 겪었다.
해녀들은 물질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바닷물을 '괄락괄락' 들이마셔야 한다. 핵오염수 투기는 제주바다를 황폐화시키고 해녀들의 건강을 해치는 범죄행위다. 청정한 제주바다는 섬사람들을 먹여온 삶의 터전이며, 제주4·3을 비롯해 엄혹한 환난의 세월을 견디게 해준 보금자리였다. 정부·여당은 제주해녀들이 왜 태왁 망사리를 불태웠는지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