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겹겹의 침묵
  • 입력 : 2023. 06.30(금) 00:00  수정 : 2023. 06. 30(금) 15:55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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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한라일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통해 일본 청춘들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그려냈던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줄곧 인물을 쫓고 기다리고 탐색하는 영화다. 겨울의 도쿄라는 스산한 배경이 존재하고 영화의 주인공인 프로 복서 케이코가 다니던 체육관이 문을 닫는 사건이 벌어지지만 영화의 중심은 오롯이 인물들의 마음을 향하고 있는 영화다. 집요할 정도로 인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필름 카메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더디고 지난한 일인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웅성이는 기척에 귀 기울이는 영화, 문득 어떤 기척에 눈을 뜨게 하는 영화다.

채 두 시간이 되지 않는 러닝타임의 영화는 시종일관 느리게 진행된다. 선천성 청각장애로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는 프로 복서로서의 삶과 호텔리어의 삶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링 위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룸 안에서는 누구보다 꼼꼼한 사람인 케이코는 별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자신의 하루를 성실하게 기록한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사건들이 있지만 감정 없이 자신이 행한 일들만을 써 내려간 케이코의 일기장은 그녀의 운동일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역시 케이코의 일지와 닮았다. 때로는 더디다고 느껴질 정도로 영화는 작고 느린 하루의 초침 사이에 놓인 틈을 지나치지 않고 지켜본다. 미세한 변화들을 골똘히 관찰하고 삶의 행간을 읽으려 자주 멈춘다. 마치 허공에 먼지처럼 부유하는 말들이 자연스레 가라앉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차분하고 건조하게.

케이코를 겹겹으로 둘러싼 사람들과 그들이 맺는 드라마틱하지 않은 관계가, 영화가 고심해 담은 시간 동안 미세한 손길로 한 꺼풀씩 벗겨진다. 섣불리 인물을 묘사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재빠른 정보를 쌓지 않는 영화는 불가항력적인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를 차분히 바라본다. 물론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알아가는 일 또한 중요하다. 고르고 고른 말들이 오갈 때 우리는 말의 무게와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대화만이 타인에게 다가서는 방법은 아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를 통해 침묵의 두께와 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영화다. 말이 멈춘 자리에 놓인 것들을 서로에게 천천히 내밀 때 영화 속 인물들은 타인에게 닿는 속도를 온전히 체감하게 되고 이는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케이코가 선택한 직업인 복서는 말없이 링 위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승부를 가리는 경기를 치러내야 하는 일이다. 권투는 또한 사각의 링 위에서 상대방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의 몸의 일부와 전부를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케이코는 신체적으로는 복서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인 체육관 회장님의 말에 따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기량'이 있는 복서가 케이코다. 기량은 사람의 재능과 도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재능에 더해진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 묵묵히 쌓아서 더해온 케이코의 시간들이, 침묵과 외침을 포함한 많은 순간들이 케이코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천천히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베이킹을 생각했다. 정량과 순서를 지켜 마침내 부풀어 오른 겹겹의 하나를 만들어 내는 일이 모두가 하루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부드럽고 촉촉하던 빵의 표면이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 또한 예기치 못한 무력감으로 굳어진 누군가의 마음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부풀어 오르고 굳어지는 과정, 그 겹겹의 시간 속에 스며드는 침묵과 기도. 그리고 딱딱해진 마음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타인들과 타인들의 예기치 못한 손길이 재건시키는 딱딱했던 누군가가 다시 무르고 뭉클해지는 순간들. 이 고요하고 고유한 영화는 그렇게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것들을 조심스레 응시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들리는 것들, 만질 수 있는 것들 그렇게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우리는 이렇게 포개져 있다고 영화는 들려준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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