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6)그날의 제주사람들 ② 치마돌격 주역들

[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6)그날의 제주사람들 ② 치마돌격 주역들
잦은 이상기후에 삼재(三災) 견디며 싸운 그해 여름 섬 사람들
  • 입력 : 2023. 07.11(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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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돌격 등 제주성 전투에 앞장선 제주사람들 면면 주목
해마다 흉년 들어 백성·물자 흩어지는 때에 거둔 값진 승리
왜구 감시했다던 망경루는 전망 좋은 2층 누각 의미만 남아




[한라일보] '명종실록'에 담긴 1555년(명종 10년) 7월 6일 기사는 그날의 전투 상황을 집약해 보여준다. 앞선 6월 27일 무려 1000명이 넘는 왜적이 제주 뭍으로 올라와 진을 친다. 김수문 제주목사가 그에 맞서 전진에 배치한 인원은 날랜 군사 70인이었다. 이들의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지만 퇴병하지 않자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馳馬突擊)한다.

을묘왜변 제주대첩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창건했던 제주목 관아 망경루에서 바라본 제주시 원도심. 이상국기자

기병이 고대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핵심 무기로 활용돼 상대를 돌파하는 기동력과 충격 효과를 지녔다면 치마돌격한 4인의 모습이 그러지 않았을까. 을묘왜변 제주대첩에서 이들의 활약 덕분에 마침내 적군이 무너지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끝끝내 투구를 쓴 왜장이 물러나지 않자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활시위를 당겨 그의 등을 명중시킨다. 승세가 제주 쪽으로 기우는 순간이다.



▶날랜 군사 70인 효용군 나서 선제공격=그해 여름 화북포로 상륙한 왜적들은 제주성 동문이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남수각 동쪽에 진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적들은 제주를 쉽게 손에 넣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제주대첩이란 명명이 말해주듯 숱한 왜인들이 그 시기에 이 섬에서 목숨을 잃었다.선제공격을 가한 70인은 용맹한 군인들을 따로 뽑아 꾸린 효용군(驍勇軍)이다. 제주대첩만이 아니라 같은 해 영암성 등 왜구와의 싸움에서 효용군이 먼저 나서 승전보를 남긴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있다.

제주목 관아 망경루. 제주시가 2007년 복원 준공했다. 이상국기자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제주도·제주연구원, 2022)에 따르면 을묘년의 승리는 효용군을 앞세워 제주의 군사와 민간이 합심해 거둔 거였다. 주요 인물의 면면을 보자. 김직손의 직책인 정로위는 1512년(중종 7)에 설치된 정예군으로 김수문 제주목사가 부임할 때 함께 온 군관으로 여겨진다. 갑사는 전문 직업군인인데 제주대첩 때는 말타기 등 무예가 뛰어난 자를 등용해 배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병은 16~60세의 평민 남자 중에 현역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보인은 정병을 지원하는 평민이었다.

이를 볼 때 김성조, 문시봉 등 제주사람들이 그날의 '영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지배계층 신분은 아니었지만 남다른 기마술과 궁술로 적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 등 적지 않은 사료가 김수문 목사를 주어로 삼아 제주성이 포위된 지 3일간 굳게 지킨 뒤 때를 기다려 출격했다는 식으로 기술했지만 리더를 따르는 제주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안에 병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들고 직접 뛰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종이 김성조 등 5명에 대해 품계 승진과 신분 상승 등의 보상을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구 부족에 너나없이 군역 져야 하는 섬=전쟁기의 제주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명종실록의 1555년 10월 12일 기사엔 제주성 전투에 힘쓴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파견했던 선로사(宣勞使)인 홍문관 부교리 윤의중의 입을 통해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과 물자가 모두 흩어지고 있는 제주 섬의 현실이 드러난다.

1702년 '탐라순력도' 중 '화북성조'. 화북진 군사훈련 장면을 그렸다. 제주도 제공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풍해, 수해, 한해, 동해 등 총 107건의 재해가 발생했다고 밝힌 김오진의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2018)를 보면 제주는 말 그대로 풍재, 수재, 한재가 많은 '삼재도(三災島)'로 불렸다. 제주대첩 전인 1514년 8월 16~17일에도 제주·대정·정의 고을에 풍우가 크게 일어 나무뿌리가 뽑히고 기와가 날려 막대한 피해를 입은 기록이 있다. 무너진 민가만 400호가 넘었고 78호가 떠내려갔다. 잦은 이상기후로 인한 기근과 역병은 아사자와 병사자를 낳았고 이는 제주도 인구가 급감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새로 쓰는 제주사'(2005)에서 을묘왜변을 다룬 이영권은 평소 제주사람들의 노고가 밑바탕이 되어 승전한 것이라고 했다. 이영권은 김상헌의 '남사록'를 토대로 당시 제주도 인구가 남자 9530명, 여자 1만3460명 등 2만2990명인데 군인의 수가 7444명이라는 점에서 양반 등 군역을 지지 않은 사람들을 뺀 남자 숫자는 아마 군인의 수와 비슷했을 것으로 봤다.

이에 더해 '남사록'은 "본주의 성안에 남정(男丁)은 500이고, 여정(女丁)은 800이다"라고 기록했다. 왜변 등이 발발했을 때 성을 지키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다는 것이다. 심각한 인구 부족 문제가 낳은 결과로 보인다. 제주대첩은 안팎의 재난 속에서 제주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싸운 거였다. 한편으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제주대첩에 얽힌 사연들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나 상징물은 드물다. 제주시가 2007년 국비 등 11억 원을 들여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제주대첩 이듬해인 1556년(명종 11) 창건한 제주목 관아 망경루를 복원했지만 제주 앞바다를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했다는 과거를 새기기는 어렵다. 일제 강점기에 훼철된 유적을 되살린 작업은 뜻깊으나 조선시대 제주에 존재했던 2층 누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임금님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만 도드라져 보인다.

김석익은 '탐라지(耽羅誌)'중 '읍성'의 한 대목에서 이런 한탄을 했다. "해자가 험하고 단단하여 실로 국가 제일의 관방인데, 하루아침에 허물어 버렸다. 애석하다." 오랜 기간 우리에게 잊힌 역사였던 제주대첩의 처지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검은색 자그만 푯돌 정도로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사람들을 기리고 있어서다.

진선희기자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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