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농업유산-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① 대천동 영남마을

[잊혀진 농업유산-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① 대천동 영남마을
옛 모습 그대로의 계단식 밭… 화전 마을 경관 간직
  • 입력 : 2023. 07.27(목) 00:00  수정 : 2023. 08. 20(일) 18:08
  • 이윤형·백금탁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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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 마을에서 잃어버린 마을로
수난과 비극의 제주 역사 관통
취재팀 숲속에서 살레왓 찾아내
곳곳 집담 밭담 우물터 등 생생
개발 바람 속 원풍경 사라질 우려


[한라일보] 제주에서 화전이란 '곶'(藪, 한라산의 밀림)의 오목한 땅에다 불을 지른 다음 거기에 작물의 씨를 뿌려 짓는 농사(農法)이다. 제주에서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불렀다. 성안(혹은 목안, 제주시 구도심)에서는 '캐운밧', 정의(서귀포시 성읍)에서는 '남친밧', '불밧', 대정에서는 '친밧', '멀왓'이라 했다. 이처럼 지역마다 다소 다르지만 보통은 '산전(山田)', '목장밭', '화전밭'이라고 했다. 대부분 경사가 심해 밭이 계단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를 '살레왓'이라 했다.

제주어 '살레'는 찬장을 말하며 '왓'은 밭이다. 찬장처럼 층층이 몇 층으로 지형과 경사를 고려하여 수고롭게 돌을 쌓았다는 의미다. 지형이나 경사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밭 한 필지 크기가 넓지 않다. 이런 밭을 '돌렝이밧'이라 했다. 제주어 '돌렝이(도렝이)'란 둥그렇게 생긴 작은 땅을 의미한다. 제주에는 '돌렝이 밭'이 많다.

취재팀은 서귀포시 대천동 영남마을에서 계단식으로 만든 살레왓을 확인했다. 영남마을은 제주4·3사건 당시 폐허가 되면서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원래는 화전 마을로 평화로운 마을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고군산과 범섬이, 북쪽으로는 어점이악과 시오름이 보이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에 계단식 화전이 보이고 우측 상단에 현대식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특별취재팀.

영남마을의 옛 이름은 '염둔(염돈)이다. '염둔'은 예전 염소를 모아 두는 곳이다. 19세기 말부터 '염둔'을 영주산 남쪽이라는 뜻의 영남리(瀛南里)라 하였다. '염둔', '내팟(川外)', '종복이왓(月山洞)', '서치마르(細草旨)' 활오름(弓山洞), 틀남밧(機木洞) 등의 중산간 마을을 합쳐 영남리라 불렀다.

1872년 '대정군지도'에는 영남리(영나모을)로 이후 일제 강점기 지도에는 영남리, 월산골(月山洞), 염둔(羔屯), 활오름골, 세초마르, 틀남골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대정군 좌면)에는, "영남의 연가(煙家)는 34호이다. 남자 58명과 여자 46명을 합하여 140명이고 초가는 65칸이다."라고 나와 있다.

1850년경 북제주군과 제주시에서 '어점이왓' 인근 '왕하리'로 건너와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판관이' 마을로 옮겨왔다. 이후 영남리 근처에 있었던 '틀낭밭' 마을 사람들까지 합쳐져서 영남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설촌 설이 유력하다.

영남마을에서 화전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마을 중심부 키 큰 팽나무 옆에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 앞은 계단식으로 된 화전 경작지가 잘 남아있다. 계단식 화전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소중한 농업유산으로 보전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숲속에서 찾아낸 계단식 ‘살레왓’, 경사면을 따라 위쪽으로 잇따라 조성돼 있다. 특별취재팀.

'살레왓'은 바로 계단식 화전과 이어진 숲속에서 확인된다. 나지막한 경사면을 따라 2m 안팎으로 사이를 두고 현무암을 쌓고 층층이 만들었다. 마을이 폐허가 된 후로 사람들이 떠나는 바람에 살레왓은 자갈과 잡목이 무성한 버림받은 땅으로 변했지만 당시 마을 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소중한 옥토였다. 영남마을은 해발 500m 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경작지는 대부분 계단식으로 조성됐다. 그 면적이 상당하다.

영남 마을 사람들은 화전 농사가 주요 생활 수단이었다. 제주 옛사람들은 오름과 목장지가 많아 좋은 경작지를 구하기 어렵고 우마를 방목해야 했기 때문에, 화입(火入, 불놓기) 할 수밖에 없었다. 화전 농사는 화입 시 생겨난 재(灰)나 '굴묵' 혹은 '정지'에서 나온 불치(재)를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이 마을의 주요 재배작물은 메밀, 조, 콩, 산디(陸稻, 밭벼), 감자, 고구마 등이었다. 약간 과장해 말한다면, 당시 불 놓기 한 후 따비로 개간한 밭에서 나온 고구마는 무만큼, 조 알곡은 어린아이 팔뚝만 했다 한다. 3개의 '몰방애(말방아)'가 있었다. 제주에는 보통 20가구에 한곳의 '말방아(연자매)'가 있었다 하는데, 이에서 보면 영남 마을이 융성했을 때는 50~60가구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제주도 화전마을에서는 농한기에 숯 굽기를 했다. 지금도 '판관이' 옛터에는 '숯막터(돌숯가마터)'가 남아있다. '조선총독부연감'에는 1914년 이후 매년 영남 마을 사람들이 신탄(薪炭)을 만들 목적으로 벌채 허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영남마을 사람들은 가혹한 세금뿐만 아니라 구한말 제주에서 벌어진 민란의 소용돌이를 겪어야만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1901년 일어난 '이재수의 난(신축민란)'은 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의 화전세 등의 남세(濫稅)와 이와 결탁한 천주교도의 폐단, 교폐(敎弊)에 맞선 제주도민의 항쟁이다. 봉세관 강봉헌이 공토 집세(執稅)를 위해, 1899년 작성한 '대정군각공토조사성책' 문헌을 보면, 상천(上川), 광평(廣坪), 광청(光淸), 서광청(西廣淸), 영남경(瀛南) 모초전(茅草田)에서 목장세로 총 710냥을 징수했음을 알 수 있다. 영남 지경에서는 삼십 냥 오전을 징수했다. 모초(새왓)는 새(띠, 茅)가 자라는 밭이다.

1898년 '방성칠 난'에도 영남마을 사람들이 참여했다. 특히 제주도의 3대 항일투쟁의 하나인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형사사건부'에 의하면 영남리에 주소를 둔 사람들이 검거되어 조사받았고, 이들 중 6명은 구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4·3사건은 영남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마을 주민 70%가 희생되었다. 1948년 11월 20일경 토벌대에 의해 영남 마을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소개령이 내려졌지만, 해안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마을 위쪽'어점이악 왕하리'와 '내명궤', '땅궤' 등에 숨어 지내던 사람들은 집단학살 되었다.

샘물터. 특별취재팀.

이처럼 영남 마을은 수난과 비극의 제주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마을 옛터에는 계단식 화전뿐만 아니라 밭담, 집담, 울타리 담이 잘 남아있다. 올레길에 무성한 대나무숲과 집터에 남아있는 '양애(양하)'군락, 통시터, 우물터, 샘물터 등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놀았던 '왕돌빌레' 등이 그대로다. 그렇지만 마을 내부에 현대식 리조트 등이 들어서는 등 개발바람에 소중한 농업유산과 마을의 원풍경이 사라질 우려를 낳고 있다.

진관훈 박사는 "영남 마을은 제주 화전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 아픔까지를 다 머금고 있다. 동시에 제주도 화전 마을의 원형과 원(原)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중한 농업유산으로서 재조명과 함께 실태조사와 보전 활용방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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