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을 역설하는 '악귀'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을 역설하는 '악귀'
  • 입력 : 2023. 08.02(수)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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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요즘 매체에는 '악귀'가 도처에 출몰한다. 지난 29일 종영한 SBS 금토드라마 '악귀', 그리고 같은 날 첫 방송된 tvN '경이로운 소문2'까지 모두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안방을 사로잡고 있다. 잘 짜인 각본에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범죄스릴러의 새 장르를 만들고 있는 드라마들은 강한 흡입력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드라마의 '성공'이 단순히 '잘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화제가 되는 매체의 이면에는 분명 그 시대 삶의 모습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대중 매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며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현실과 판타지의 모호한 경계는 과연 '누가 악귀이고 누가 사람인가'라는 질문으로 전이된다. 보이스피싱, 학교폭력, 아동학대, 불법 대출과 악덕 사채 등 드라마의 주요 서사로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렵지 않게 현존하는 사건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성을 상실한 기괴한 사건들 앞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 그것이 이 시대 '악귀'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기적인 부모의 욕망이 젊은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불행에 대한 원망을 불특정 다수에 대한 날 선 증오로 분출한 일련의 사건들을 접할 때면 '참혹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절망이 심장을 조여 온다. 드라마 속 악귀는 어린 시절 숨죽이며 봤던 '전설의 고향' 속 귀신들과 시대와 사회적 배경만 바뀌었을 뿐 저마다의 '한'이 원귀의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살아서' 받은 배제와 차별, 폭력과 불평등의 경험들이 원귀를 만들고 원귀는 다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라는 힘에 의해 여전히 폭력과 불평등이 반복되고 그 균열의 틈에는 혐오와 증오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굳이 순서를 두자면 '살아서'가 먼저인데 그렇다면 살아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살아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제시한 '에우다이모니아'(eudaemonia)라는 개념이 있다. 흔히 '행복'으로 번역되곤 하지만 행복의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범위, 그리고 사회적 영향과 심리적 요인에 의한 여러 논의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eu', 'daimon'의 합성인 'eudemonia'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이는 '좋은 영혼'을 뜻한다.

어쩌면 행복은 개인을 넘어 함께 하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뿐 아니라 죽은 자의 안녕까지, 이 땅에 머물다 가는 모든 존재의 안녕을 걱정하는 '좋은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악귀들이 잔인하게 세상을 역설하게 된 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뼈아픈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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