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지난 5월 중순 이 난에, 졸고 '쓸쓸한 스승'을 게재했다. 글에서 필자는, '스승의날'에조차 존재감을 잃은 선생님의 안타까운 위상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세상이 학교와 교사에 대해 가지는 무지와 무시, 무례가 부추기고 있으며, 이는 국가적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본다"라고 썼다. 그 두 달 후 서울의 초등학교에서, 교육계의 보배로 성장했을 새내기 교사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중앙 일간지는 이에 대해, "교육이 죽었다"라고 했다. 필자는 '죽은 교육'이 그 선생님을 희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의 죽음'은 이기적인 세태와 교육에 무정한 사회가 초래했다. 주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비극이 그전에도 여럿 더 있었다. 다음은 어느 신문 사설의 일부다. "교사들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로 걸려 오는 학부모들의 전화가 큰 스트레스다. 그나마 학업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사생활에 관해 묻거나 고성ㆍ욕설을 하는 등 황당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래서는 교사들이 본업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기 어렵다." 서울 교육감은 "학교 현장에서 민원이 발생하면 그간 학교나 교육청, 교사를 '죄인'처럼 간주했다. 이를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후속하는 대응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당국은 아직도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대증적 처방으로만 이 현실을 대하고 있는 것 같다. "무분별한 아동학대 신고로부터 교사들을 보호하겠다. 민원은 학교 차원에서 대응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사전 예약을 거쳐 개방된 상담실에서 학부모와 교사가 만날 수 있게 한다.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는 아동학대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교육활동을 침해한 학생과 피해 교사를 즉시 분리하겠다." '무분별한'과 '꼭 필요한'은 누가 정하나? '생활지도의 정당함'은 누가 판단할 것이며, '교육활동 침해'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느 정도라야 할 것인가? 문제의 해결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교육의 정상화는, 교육청과 학교, 교사, 학부모·학생 등이 서로 간의 대결이 아니라 신뢰를 구축하고 정리(情理)를 회복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조목으로 규제하려 해선 안된다. 다분히 대중영합주의가 작용했을 학생인권조례는 학교의 규칙과 제 규정을 무력화하고, 교사들의 사안 대응을 속수무책으로 몰아넣었다. 초·중학교의 운영은 초·중등교육법의 법령과 규칙이 제어하면 됐다.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일반 법규로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제, 유명무실한 방안을 졸속으로 제정·고시(告示)·시행할 때가 아니다. 기본으로 되돌아가서, 교육청과 학교에 법 테두리 안의 재량권을 충분히 제공하고, 교사에게 교육활동의 권한과 책임을 최대한 부여해 '학교'를 살려야 한다. 그게 학생을 살리는 바른길이다. 그런데 이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니 학교는 여전히 그저 쓸쓸해 보일 뿐이다. <이종실 전 제주외국어고등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