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다보호 더는 미룰수없다] (13)제주도의 문화 정체성을 바다에서 찾아야!

[제주 바다보호 더는 미룰수없다] (13)제주도의 문화 정체성을 바다에서 찾아야!
세계 대표 해양문화 제주 해녀어업과 전복문화권
  • 입력 : 2023. 11.06(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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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쿠로시오 해류' 따라 제주로 건너온 신화·사람
한국의 대표 해양문화 '제주 해녀' 고려 시대부터 기록돼
제주-일본 교류의 확실한 증거, 전복… ‘전복문화권’ 제안

[한라일보] 사회학자인 조성윤은 올해 나온 잡지 '뮤지엄 오퍼스(3권 제주)'에 실린 글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역사 자료에는 탐라국 사람들이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상업 활동을 활발히 한다는 표현은 자주 나오지만, 농사를 짓는다는 표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같은 문단의 말미엔 "결국 제주 해민들은 오랫동안 수산업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데다 배를 건조할 수 있는 목재도 풍부했고, 건조 능력도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라고 했다. 역사적 기록의 여부와 관계없이 해양환경을 바라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가까운 일본 그리고 류큐 열도와 중국과 교류가 잦았음이 틀림없다.

제주 해녀의 이미지는 제주도 디자인의 핵심 개념이자 브랜드 가치이다. 사진 장남원



바닷고기와 돼지, 사람도 바다를 건너와

제주도는 섬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지만 과거 육지에서 볼 때는 항상 절해고도였다. 외딴섬, 세상과는 격리된 곳처럼 보이고, 섬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갇힌 공간이었으나 주민 누군가는 이상향을 향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가 만들어졌다. 문화는 "자연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자취, 즉 살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섬의 문화는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화가 고립되어 전승되었다. 허남춘은 책 '바다에서 바라본 제주바당-해양 제주(2020)'에 실은 그의 칼럼 '신화 속 해양 제주'에서 "섬은 신화나 신앙체계도 다르고 문화 인식도 다르다고 했다. 한반도의 신화는 천상에서 하강한 신의 내력이 위주인데 제주 신은 땅에서 솟아난다. 그리고 그 배우자는 대개 바다를 건너온다."라고 덧붙였다. '건너온다'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제주 해녀는 수백 년 동안 제주 바다에서 생태계 일원으로서 어업을 해왔다. 사진 김병일

11월인데 한낮에는 여름 더위가 느껴진다. 28℃다. 초겨울 옷을 들고 왔다가 반소매 차림으로 다녀야 할 정도다. 다이버들은 수심 20m에서도 수온이 23℃라고 하며 놀랜다. 어젯밤 다이버들끼리의 대화에서는 "다 쿠로시오 때문이야" 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안다. 아열대성 환류인 '구로시오'는 열을 북쪽으로 실어 나르는데 이미 수온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채로 제주도로 도달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제주 바다에서 열대나 아열대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을 보면 저 녀석들이 플랑크톤 시절 해류 타고 와서 예까지 와서 살아남았구나 했다. 해류가 생물 인자들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지만, 이 바다 생태계와 기후를 변화시키진 않았었다. 적어도 20여 년 전까지는.

앞의 책의 저자들은 문화도 그 해류가 날랐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오갔을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또 18세기에 작성된 것이긴 하나 장한철의 '표해록'과 정운경의 '탐라문견록'을 통해서 표류에 대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역설적으로 안전한 항해가 가능했음을 잘 보여준다. 주강현은 위 책의 기조문(keynote)에서 제주도의 문화를 '돼지고기와 흑우의 문화권'이라 하였고, 또 '해녀와 잠수어업' 문화권이라고도 했다. 잠수어업은 남방에서 온 것이라 하였으며 해녀도 독창적인 문화가 아니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제주 바다 수심 20m 바위 위에 서식하는 대형 전복. 사진 김병일



한국 해양문화의 대표 '제주 해녀 어업'

제주도의 대표 해양문화라고 할 수 있는 '제주 해녀 어업'은 '국가 중요어업유산 제1호(2015)'이며, 2016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면서 201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132호'로까지 지정되었다. 그러니까 해녀는 국가의 대표 유산이자 전 세계를 대표할 만한 문화인 것이다. 1791년 전남 평일도를 찾은 위백규가 적은 기행문 '존재전서' 중 '금당도선유기'에는 '해녀채복(海女採鰒)'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제주 문인 고훈식은 글 '제주 해녀'에서 "해녀라는 말이 일본잔재라서 껄끄럽다고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썼다. 그런데도 제주에서는 과거 '잠녀(潛女)'나 '잠수(潛嫂)'로 널리 불렸음을 여러 기록에 찾을 수 있다. 제주 해녀의 존재는 12세기 초인 고려 시대 기록에도 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김상헌의 '남사록(1601)', 이건의 '제주풍토기(1630년경)', 이형상의 '탐라계록초(1702)' 등에도 그녀들의 활동상이 남아있다. 이 시기에는 제주도뿐 아니라 남해안 일원에서도 해녀어업이 행해졌음을 위 위백규가 남긴 글과 정약용이 유배지 경남 장기현에서 쓴 시 '아가사(兒哥詞)'에서도 나타나 알 수 있다.

제주 해물탕에는 오분자기가 없지만, 한 식당에서는 여전히 '오분자기 해물탕'을 팔고 있다. 사진 제종길

제종길 한국종합환경연구소 수석위원·제주바다포럼 고문



제주 바다 환경과 향토 음식의 연계성을 알아야!

앞의 책에 실린 김경주의 칼럼 '선사 고대 제주도의 해양고고학적 궤적'이나 홍기표의 칼럼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서의 탐라'에서 잘 알 수 있고, 특히 같은 책의 '별과 항해의 주인 성주(성주)'에서 바다를 통한 왕성한 교류에 대한 확신이 더 선다. 제주도가 한반도 외에도 일본과도 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일본으로 가져간 '탐라복 6근(六斤)'이라고 적혀 있는 745년의 목간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주된 어업 목표는 '전복'이다. 주요 교류 품목이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전복 중에서도 크기가 큰 전복들인 '말전복'과 '왕전복'이 핵심 대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기하게도 일본에서 해녀 어업이 활발했던 해역과 두 종의 분포가 잘 일치한다. 이 두 종은 바로 제주도와 혼슈 연안의 고유종이자 귀하디귀한 수산물이었다. 적어도 수백 년 동안 해녀들은 연안 생태계의 일부였고,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면서 어업을 하였다. 이 일대를 '전복문화권'으로 제안한다. 이곳이 해녀의 발상지는 아닐까? 이들 생물이 사라지면 음식을 비롯한 해양문화도 사라진다. 국내외 사례도 많다. 또한, 위기다. <제종길 한국종합환경연구소 수석위원·제주바다포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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