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2)벗에게 부탁함-정호승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52)벗에게 부탁함-정호승
  • 입력 : 2024. 01.30(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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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삽화=써머



너무 흔해서 사랑인 줄 모르는 새 같은, 꽃 같은, 봄비 같은 게 얼마나 많은가요. 물가에 잎새에 눈동자에 언뜻 보이다마는 것들은 또 어떻고요. 그런 게 그리움이고 보고픔이며 보내야 함인 걸 알아채기 위해서 욕이라도 그런 말로 해주오. 마당 쪽으로 굽어진 담팔수 긴 가지 위에 뜬 온달이 당신을 배웅하는 것이고, 수선화 꽃 한 송이가 창가의 당신을 비추는 걸요. 동네를 돌며 폐지를 싣는 외로운 노부(老夫)의 머리 위에 새 한 마리가 짹짹거리네요. 그게 모두 사랑인 줄 알고 있으니 이왕 들을 욕이라면 온달 같은 놈, 수선화 같은 놈, 새 같은 놈이라고 해주오. 당신을 잊고 지내면 누구든 내게 손가락질해다오. 당신 같은 놈, 연인 같은 놈, 이라고. 오늘은 내가 나무 곁에 앉아 살랑거리는 잎사귀와 바람의 갸륵한 노동으로 기운을 차리네요. 벗이여, 이생에선 그 역할을 그대가 맡았으니 다음 생엔 내가 맡아볼까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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