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만의 한라시론] ‘무명신위’의 효과

[고성만의 한라시론] ‘무명신위’의 효과
  • 입력 : 2024. 03.21(목)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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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4·3희생자 무명신위 위패조형물 제막식'이 지난 12일 4·3공원에서 거행됐다. 1년이 넘는 기획과 조정을 거쳐 마련된 의식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고, 참석자들도 마음을 한데 모아 안식과 영면을 기원했다. 공적 공간에 '무명신위'가 등장하게 되면서 '희생자'에게만 주어져 온 애도 받을 권리의 범위도 확장될 수 있게 됐다.

한편 기념 공간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 지형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무명신위'가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주최측은 '무명신위'를 '미신고자' 혹은 '희생자로 결정되지 못한 자',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자'와 같이 다양하게 규정한다. 이름(名)이 없거나 알 수 없다는(無) 사전적 의미만 놓고 본다면, '무명신위'가 세 부류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의 '희생자' 심사, 결정과 그것을 둘러싼 갈등, 합의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면, 이들을 '무명신위'로 일괄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4·3특별법 제정 이후 4·3에 연루됐던 사람들의 공적 신분은 크게 '토벌대'와 '주민'이 '희생자'로 재구성되는 한편, '무장대' 가운데서도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무장대 수괴급 등'으로 지목된 사람은 '희생자'에서 제외됐다. 그로 인해 가해와 피해, 혹은 양극단으로 구도화되기 어려운 다종다양한 관계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보류된 채 '희생자'가 4·3의 기억을 획일화하고 4·3의 유산에서 저항, 자치, 자주의 의미를 탈각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게 됐다.

주최측은 '무명신위'를 2003년 시점에 추정된 희생자 2만5000~3만명 가운데 공식 결정된 '희생자' 1만5000여 명을 뺀 '나머지 1만 명이 넘는 자'로 구체화했다. 무명을 수치로 환산하는 모순적 발상에 대한 지적은 차치하더라도, 이 같은 셈법은 '무명신위'를 '희생자'와 반대되는 영역 또는 개념으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과연 그들을 '무명신위'로 일원화, 균질화할 수 있을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미처(未) 신고하지 못한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념에 따라 '희생자'로 편입되기를 거부하는(非) 이들도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이력을 문제 삼아 심사 과정에서 철회 당하거나 '불량위패' 논쟁에 휘말려 '희생자' 자격이 박탈되는 등 이름을 빼앗기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돌아야 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불교와 무교, 유교식 제례까지 온종일 이어진 종교의식을 통해 '무명신위'를 평안히 좌정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하루였지만, '희생자'가 그러한 것처럼, '무명신위'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무명'은 특별법의 지향인 '규명'과 '회복'에 역행할 뿐 아니라 아직 부상하지 않은 이름들의 가능성을 억누르는 효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성만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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