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봄에 가늘고 여리게 싹을 내밀었던 풀들은 이제 거침없이 땅을 덮고 있다. 쑥과 민들레, 환삼덩굴, 칡, 찔레, 익모초…. 풀 하나하나는 저마다 이름과 쓰임새를 지녔지만, 농부의 눈에는 결국 검질이다. 작물을 키우기 위해서는 뽑아내야 하고 베어내야 한다. 모질게 굴 수밖에 없다.
농사가 일상이던 시절, 예전 농부들은 초봄부터 가을까지 검질과 씨름했다. 퇴비 만들고 땅심을 돋우며 자연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가 된 지 오래다.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농업이 지녔던 생태적 기능은 약해졌다. 가공과 유통 역시 자본 중심 구조로 재편되면서 수천 년 이어져 온 농민들의 전통적 방식은 비효율과 낙후의 이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현대 농업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까지 말한다.
제주에서 농업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산업 비중과 종사자 비율이 각각 10% 안팎을 차지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농업이 위축되면 제주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미 현실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읍·면 지역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직면했고, 도시의 일자리 역시 서비스업과 도소매업에 집중돼 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제주를 떠난다.
세상도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에서도 AI가 중요하다는 말만 무성할 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제주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독립 전력망을 갖고 있고, 관광·농업·수산업에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미래 자산인데 이를 연결하고 활용할 비전이 없는 게 문제다.
제주의 다음 10년, 20년을 설계할 때인데도 말이다.
제주는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안에서의 경쟁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지도를 조금 넓게 펼쳐 보면 제주는 한반도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동북아 해양 네트워크의 중심에 가까운 곳이다. 탐라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세상과 연결했듯 앞으로의 제주도 서울과 한반도만 바라보며 경쟁할 것이 아니라 동북아와 세계를 향한 장기적 비전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제주를 단순한 관광의 섬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의 섬, 미래 산업과 생태가 공존하는 섬으로 만드는 청사진이 필요한 이유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성적과 입시를 넘어 제주를 이해하고, 세계를 읽고,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는 도민의 자기 결정권과 사회적 합의 위에서 추진돼야 한다.
눈앞의 현안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10년, 20년, 50년 뒤 제주가 어떤 섬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선출된 도지사와 교육감, 도의원들이 농부의 이런 바람에도 한 번쯤 귀를 기울여 주기를 기대한다. 검질을 매는 농부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송창우 제주와미래연구원장·농부>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