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5월이 되면, 숨 가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의 가족과 친지를 살피는 여유를 찾는다. 특히 가까이 계셨다가 먼저 영면하신 어른들이 더욱 그립다. 제주 한국화단의 1세대였던, 부친 호암 양창보 화백(1937-2007)을 떠나보낸 지도 어느새 17년이 흘러 이젠 기억에서조차 흐릿하다. 그나마 공공청사에 걸려있는 호암의 그림을 조우할 때 잠시 숙연해진다. 그래서 개인적인 부자의 연을 떠나, 제주 문화예술계의 후배로서 호암을 기억할 만한 일을 모색해 왔다.
그에 따라 최근 '호암의 화폭 따라 제주 공공청사를 산책하다'를 주제로 문화예술 영상 시리즈를 제작 발표하고 있다. 이는 건축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호암의 그림과 공공청사의 공간을 잘 엮어낸다면 도시의 매력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의도를 담은 영상이다. 그러나 제작 현장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공공청사는 도시민이 애용하는 구심적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걸려있는 공간은 작품들과 상호 관계 맺음이 없는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아름다운 그림과 만남이 행복하지 않았다. 열악한 공간 속에서 겨우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그림들의 모습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대로 방치해 놓는다면 곧 생명이 꺼질 골든타임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 제주도청사 대회의실 입구에 걸려있는 '한라산 조망도'는 500호가 넘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무관심 속에서 45년째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의원회관 강당의 벽면에 있는 '영주 10경'의 상황은 그림 앞에 모니터가 설치되어 고급 벽지의 처지에 놓여있었고, 제주시청 별관 입구에 있는 대작 '삼의악'의 주변 환경도 햇빛에 노출되고 행인에 의한 손상에 무방비로 걸려있다. 문화예술이 충만한 도시의 장소를 상상했던 꿈은 상실의 허망으로 바뀌었다. 이는 비단 호암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조금의 생각 전환만으로도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먼저 공공청사의 그림들을 총무과에서 관리하는 비품에서, 도립미술관이 운용하는 예술품의 지위로 돌려놓자. 그리고 예술품의 격에 맞는 공간의 환경을 개선하자. 더불어 그 작품들을 비평하고 도시민에게 해설해 줄 도슨트를 운영하자. 이를 위해서 '공공청사 내 예술 작품의 관리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법적 근거도 마련하자.
이런 조건이 충족된다면, 공공청사는 도시민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건강한 미술관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주 미술계가 열망하는 작가 미술관을 공공청사와 결합한 건축도 가능하다. 어느 지역 출신의 작가가 평생의 그림을 기증한다면, 출신 지역의 읍·면 청사와 작가 미술관을 통합한 건축을 상상할 수 있다. 도시의 품격은 예술 작품과 건축공간이 창출한 '장소'에서 비롯된다. 제주 지역 화가들의 그림을 만나기 위해 제주의 공공청사를 산책하는 문화도시 제주의 일상을 그려본다. <양건 건축학박사·가우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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